<em>가해자 수가 계속 늘어난다. 경찰은 5월 말 디지털성범죄에 가담한 536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텔레그램 ‘n번방’의 시초인 ‘갓갓’ 문형욱은 대화방 10여 개를 운영하면서 피해자 약 60명을 착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피해자가 몇 명인지는 짐작하기 어렵다.</em>
<em>불가능한 가정을 해본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퍼졌더라면, 경찰이 불법촬영물의 온상이던 소라넷을 폐쇄하는 데 17년이나 걸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국외 서버라는 이유로 수사하기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면, 오프라인에서 일어난 성폭력도 아닌데 왜 유난을 떠냐는 왜곡된 시선이 없었다면. 무엇보다 ‘온라인 커뮤니티’라는 공동체를 안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면, 트위터·텔레그램·디스코드로 플랫폼만 바뀐 ‘제2의 소라넷’이 생기고 또 생겼을까. 그랬다면, n번방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여성 청소년이 있다. 11살에 디지털성착취 피해를 처음 입고, “만나주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을 당하고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뿌려졌다. 트위터에 2분 안에 답하지 않는다고 낯선 남자들이 찾아와 때리고 집단 성폭행을 가했다. 그렇게 ‘n번방 이전의 n번방’ 피해자는 고통의 시간을 4년이나 버텼다. 이제 16살이 된 그에게 가해자 협박은 줄었지만 “아직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 지옥 같은 나날이 ‘나 때문에’ 일어났다는 자책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트위터 앱을 깔았으니까, 계정을 만들었으니까, 가해자를 탓하기보다 피해자를 탓하는 데 익숙한 사회에서 그는 자신에게 손가락질한다. 성폭력 피해자, 특히 그루밍 피해자들의 치명적 특징이다.</em>
<em><한겨레21>은 디지털성착취의 근원을 파헤치고 실태를 추적 보도하는 ‘너머n’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아동·청소년의 디지털성범죄 구조에서 출발점인 ‘그루밍’이다.</em>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제보와 의견은 nchungso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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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두고 ‘이런 게 있었다니 충격’이라고 했지만, 사람들이 어느 지점에서 충격받았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피해자들이 나랑 비슷하네, 많이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는 정도…. 내겐 그게(가해) 일상이고, 당연했으니까요.”
2019년 11월,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한겨레>에 보도된 뒤 가해자가 하나둘 잡히면서 한국 사회는 떠들썩하다. ‘갓갓’ ‘박사’ ‘잼까츄’ ‘로리대장태범’ 등 가해자들의 잔혹한 범행 수법을 두고 대중은 혀를 내둘렀고, 정부는 디지털성범죄 근절 대책을 줄줄이 내놓았다. n번방 관련 소식이 뉴스에서 빠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신종 범죄인 양 호들갑 떠는 모습에 ‘n번방 이전의 n번방’ 피해자 강지오(16·가명)양은 되레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취약성을 살펴 접근해 통제 유지
지오는 2015년 가을부터 2018년까지 약 4년 동안 트위터와 메신저 앱 ‘라인’ 등에서 디지털성착취 피해를 입었다. 협박과 성착취는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졌다. 자신을 가해한 사람들이 여전히 범행을 저지르고 있을지, 아니면 잡혔는지 지오는 모른다.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n번방에서 다른 여성들의 성을 또 착취했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지오가 겪은 성착취 피해는 그 마디마디마다 미국의 법정신의학박사 마이클 웰너가 분석한 ‘그루밍 6단계’와 겹친다. 사전적 의미로 ‘몸을 치장하는 것’을 뜻하는 그루밍은, 성폭력 사건에서 아동·청소년에게 성착취 목적으로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가해자의 행위를 말한다. 마이클 웰너는 그루밍 과정을 아동의 취약성(경제적 이유, 관심 등)을 토대로 피해자를 골라(1단계) 신뢰를 쌓고(2단계), 그의 욕구를 충족해(3단계)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며, 아동을 고립시켜(4단계) 관계를 성적으로 변환해(5단계) 통제를 유지(6단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착취에 응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본인도 사회도 피해자라고 인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오처럼 말이다.
“안녕.” “몇 살이야?”
2015년 겨울, 트위터에 계정을 만든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DM(다이렉트 메시지)이 왔다. 전혀 모르는 남자들이었다. 트위터 프로필에 ‘나이 11살, 닉네임 ○○’만 적혀 있는 지오의 계정이었다. 호기심으로 만든 계정에서 만난 얼굴 모르는 이들은 친절하고, 은밀하게 다가왔다.
11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국내 한 포털 사이트에서 ‘학생, 돈 버는 방법’을 검색했을 뿐이었다. ‘10~15살/ ○○○에서 1명 구함/ 페이는 ○○원’이라는 제목을 타고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본 트위터에는 자신의 노출 사진이나 선정적인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사진을 올려 돈을 버는구나, 나도 한번 해볼까’가 시작이었다. 일명 ‘일탈계’. 일탈계는 ‘일탈계정’의 줄임말로, 소라넷, 텀블러 등 익명성이 보장되는 플랫폼을 옮겨가며 유지됐다. 일탈계를 알게 된 지 하루 만에, 지오도 계정을 열었다.
‘칼답’하고 ‘오구오구’ 해줬어요
지오는 사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지역 소도시, 성인 일자리조차 적은 곳에서 초등학생이 돈을 번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지오의 용돈은 주당 2천원. 턱없이 부족했다. 부모님에게 용돈을 올려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집안 어른들은 항상 “돈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업 수완이 없는데다 엄마는 암 투병 중이었다. 엄마의 병원 진료비로 300만원이 찍힌 걸 보고, 지오는 스스로 용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바도 해봤다. 친구 부모가 운영하는 치킨 가게에서 상자 접는 일을 도왔는데 친구 엄마는 돈 대신 놀이 이용권 1천원짜리를 끊어줬다.
‘학생, 돈 버는 방법’이라는 트위터 일탈계정을 살폈다. 프로필에 나이와 닉네임이 적혀 있었다. 그대로 따라 했더니 팔로어가 한두 명씩 늘었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는데, 이쪽 세계에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인기가 있었어요. 그들은 칼답(답장을 빨리 하는 것)했고, ‘오구오구’ 해줬어요.” 늦둥이라는 이유로 받는 집안의 과잉보호와는 다른 종류의 관심이었다.(그루밍 1단계 피해자 물색과 2단계 아동과 신뢰 쌓기)
처음엔 ‘알계’(트위터에 프로필 사진을 올리지 않아 기본 알 모양 사진으로 지정됨)였던 프로필을 팔로어가 조언한 대로 사진으로 바꿨다. 나뭇가지에 음표가 걸린 알록달록한 나무 사진이었다. “적극적이지 않다” “너는 계정을 운영하고 싶은 게 맞냐”던 그들의 말이 “내가 말한 대로 바꿨네” “말 잘 듣는다” “이쁘네”로 바뀌었다. 게다가 그들은 초코우유, 바나나우유, 막대사탕을 편의점에서 교환할 수 있는 기프티콘을 보냈다. “초코우윳값 1천원은 한 달 용돈 8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어요.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좋았어요. 또 (친절하게) 기프티콘의 유효기간이 언제까지라고 알려주기도 했어요.”(3단계 아동 욕구 충족하기)
한 달가량 지나자 “네 몸 사진을 올려보지 않겠니? 그럼 내가 더 예뻐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메시지들이 왔다. 기프티콘도 받았으니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관심을 잃기 싫어서(4단계 피해자 고립) 그들이 올려달라고 하는 노출 사진을 올렸다. 그들이 사진으로 요구하는 포즈는 ‘○○자세, △△자세’ 같은 매뉴얼이 있었다. “이 자세를 취하면 예쁠 것 같아. 예뻐해줄게.” 거듭되는 요구에 사진을 올리면(5단계 성적인 관계 만들기), 칭찬과 함께 기프티콘을 추가로 받을 수 있었다.(6단계 통제 유지) 노출 사진을 올리기 시작하자 팔로가 20명에서 1천 명 단위까지 늘었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이뻐해주고 나만 봐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지나고 보니 그 사람들 몇백 명을 팔로하는 거더라고요. 당장 주는 애정이 좋아 그땐 그런 (나에게만 애정을 보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지오 또래인 중학생 12%, 초등학생 4%도 지오처럼 ‘온라인에서 성적 접근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2017년 ‘탁틴내일’ 설문조사)
악질 중 악질을 만나다
DM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이 “계정을 넉넉하게 (여러 개) 만들라”고 했다. “너를 좋아하는데 (한) 계정이 차단되면 너를 어디서 보냐”는 거였다. ‘나를 좋아하는 건가 싶어서’ ‘나만 봐주는 게 좋아서’ 추가 계정을 5개 더 만들었다. 첫 번째 계정이 음란물로 신고당했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본계정이 차단되면, 새로운 계정을 알리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알아서 잘들 찾아왔다. 계정 하나를 만드는 데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 악질 중 악질을 만났다. 닉네임 ‘○○송이’. 그가 한 여성의 노출 사진과 함께 보낸 트위터 DM 내용은 “네 신상을 퍼뜨리기 전에 (이 여성처럼) 내 말을 따라라”였다. 트위터에 가입할 때 개인정보를 기입하지 않는데,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지오가 다니는 학교와 집주소를 알고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정보를 알고 유포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멘붕’이 왔다. “신상을 뿌리기 전에 (얼굴을 뺀) 몸 사진을 찍어 보내라.” “너인지 확인하기 위해 네 닉네임을 쓴 포스트잇을 몸에 붙이고 찍어라.” 명령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렇게 올리거나 보낸 사진들은 누군가의 계정에 지오의 아이디와 함께 박제됐다.
‘○○송이’가 보낸 메시지에 답해야 하는 시간은 2분. “수업시간엔 바로 답을 할 수 없잖아요. 메시지에 답을 늦게 하면 그는 ‘지정한 곳으로 가라’고 해요. 가보면 그가 보낸 20대로 보이는 남자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들은 날 때리기도, 유사 성행위를 시키기도 했어요. 이 과정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촬영됐어요.” 답변 제한 시간(2분)을 어기면 초과 시간 1분당 한 대씩 맞아야 했다. 남자들은 선글라스, 모자 등으로 얼굴을 가린 채 ‘지정한 곳’에 나타나 때렸다. ‘나는 신상이 까발려져서 맞는데, 누군가는 때리면서도 알려지지 않길 바라는구나’ 지오는 생각했다.
‘○○송이’의 아이디를 차단해도 그는 남자들을 보냈다. 차단과 해제를 몇 차례 반복하자 ‘○○송이’는 지오의 이름과 나이, 집, 연락처와 사진과 영상을 한 인터넷 사이트에 퍼뜨렸다. 발신자 제한 번호로 전화가 폭주했다. “내가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사는 고등학교 학생이 ‘너, 나랑 가깝네’라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어요.” 지오는 그냥 전화를 끊었다.
트위터 계정을 만든 뒤 4년 동안 낯선 이들은 협박과 미끼 던지기를 멈추지 않았다. 협박은 원치 않는 성행위로 이어졌고, 이는 또다시 협박을 불렀다. 인터넷에 지오의 신상이 퍼진 뒤 자신들을 ‘공무원’이라고 칭한 한 그룹이 연락해온 적도 있었다. 그들에게 불려간 무인텔에서 그들은 “비밀 유지가 필수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에서 사람들이 너를 다 알아보게 하겠다”며 서약서를 내밀었다. 지오는 서명하고 큰 소리로 읽어야 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약 20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그들은 11만원을 지오 손에 쥐여주고, 사후피임약을 먹는 것까지 지켜봤다. 이 과정은 모두 녹화됐다. “그들이 준 문서엔 ‘익일’(다음날) 같은 어려운 단어가 적혀 있었어요. 제대로 읽어보진 못했지만, 비밀 유지 서약서에 사인(서명)을 했으니까 비밀은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고 했거든요.”
3분 만에 성적인 주제, 8분 만에 유대관계 형성
경찰에 신고하거나 가족에게 알릴 생각은 하지 못했을까. 학교에서 따돌림을 겪었을 때 자신을 외면했던 어른들을 경험한 지오는 무조건,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나이 11~14살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왕따와 디지털성착취, 자해, 가출, 조건만남…. 끝날 것 같지 않은 지옥 같은 나날은 경찰이 부모에게 연락해 지오의 휴대전화가 사라지면서 일단 막을 내렸다.
지오가 경험한 피해는 SNS나 채팅 앱 같은 온라인상에서 ‘그루밍’으로 시작해 성착취 사진·영상을 찍어 전송하도록 요구받고 그 사진·영상을 빌미로 개인정보 유포·협박으로 이어지는, 최근의 디지털성착취와 같은 구조를 띤다. n번방의 ‘시초’인 갓갓이 텔레그램을 통해 다른 남성에게 미성년자를 성폭행하도록 지시했던 것처럼, 온라인성착취는 오프라인의 성폭행·성매매로 옮겨간다.
아동·청소년의 디지털성착취 구조에서 그루밍을 주목하는 건, 그것이 출발선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동과 신뢰관계를 쌓기 유리한 지위에 있는 교사, 스포츠 코치, 종교지도자 등 면식 관계에서 주로 그루밍이 이뤄졌지만, 최근엔 비면식 관계에 있는 성인들이 온라인상에서 성적 목적을 품고 아동·청소년에게 접근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과거엔 가해자가 그루밍 범죄를 저지르려면 집 밖으로 나가서 아동을 만나야 했다면, 최근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집 안에 앉아서 언제든지 손쉽게 아동에게 접근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영국 미들섹스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아동과 온라인에서 대화할 때 3분 만에 성적인 주제를 꺼내고, 8분 만에 아동과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한다.(2017년 탁틴내일연구소) 지난 3월 검찰이 특정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의 피해자 20여 명 중 절반가량도 미성년자였다. 온라인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들은 피해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경우가 많다. 지오도 “만나지 않으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는 협박을 당하고, 개인정보가 인터넷상에 뿌려지는 피해를 입었으면서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트위터 앱을 깔았으니까, 계정을 만들었으니까, 지오는 그들이 아닌 자신을 ‘때문에’의 주어 자리에 놓았다. 언뜻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성착취에 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다, 피해자 스스로 자신이 학대당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탓이다. “피해자는 때로 가해자를 좋아하고 심지어는 사랑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삶에 장기적이고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다.“(권현정 탁틴내일 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사회가 나를 피해자로 봐준다면…
‘피해자가 동의한 것처럼 보이는’ 그루밍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손가락질의 방향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꽂히기 일쑤다. 2018년 가을, 경찰의 연락으로 지오가 일탈계를 운영하고 성매매한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어떻게 일탈계를 운영하게 됐는지, 온라인에서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지오에게 묻지 않았다. 딸이 자발적으로 온라인에 몸 사진을 올렸다는 것만을 부끄러워했다. 그저 동네에 소문이 나지 않도록 다른 지역 경찰서에서 조사받기 원했고, 이 사건을 묻어두기 바랐다. “경찰 조사를 받은 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누군가 몸을 보여달라고 하거나 만지려고 하면 안 돼요, 싫어요라고 해’라는 말을 두 시간 넘게 들었을 뿐”이다. 경찰 조사를 받은 뒤 가족 누구도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오의 가족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고 있다.
경찰도 지오를 피해자로 보호하지 않았다. “경찰의 첫 번째 질문은 ‘네가 스스로 (일탈계 운영·성매매) 했지?’였어요. 그 뒤에 이어진 말은 ‘네가 이걸 안 했으면 남자 꼬일 일 없었는데 왜 했냐. 소년원 보내야겠는데’였고요.” 지난 5월 개정되기 전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은 성매매의 대상이 된 아동·청소년이 강요에 의해 성매매에 응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피해 아동·청소년’이 아닌, 성매수자의 ‘대상 아동·청소년’으로 분류한다. 소년법에 따라 보호처분도 가능하다. 당시 법이 그랬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경찰에서 적극적으로 피해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점은 비판받을 만하다. 지오는 이렇게 가족, 사회, 법의 외면 속에 ‘성착취 피해자’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협박당했을 때 그들에게 ‘나한테 왜 이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그만해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네가 먼저 계정을 시작했잖아. 자업자득’이라고 말했어요. n번방 사건이 알려진 뒤에도, 댓글이나 유튜브에서 피해자를 탓하는 걸 봤어요. ‘피해자, 힘내세요’라는 댓글을 보긴 했지만, 내 주변에선 그런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가 나를 피해자로 봐준다면….”(지오)
디지털성범죄에 노출된 피해자에게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이 꼭 필요한 이유는 주변의 지지를 통해 자신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범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권현정 부소장은 “일부에선 성장 과정에서 성적 호기심 등의 이유로 노출 사진을 올린 사람이 범죄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었거나 밤늦게 돌아다녔다는 이유로 범죄를 정당화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지오를 지원하는 최연우 멘탈헬스코리아(서울시 산하 비영리민간단체) 대표는 “지오가 도대체 어떻게 버텼을지 상상이 안 돼서 미안하다고도 못하겠다. 지오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게 사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 대표는 지오처럼 자해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쓰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지오도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쓸 준비를 하고 있다. “힘들어서 한 페이지 쓰는 데 3~4시간 걸리지만, 그래도 전 괜찮을 거예요. 그리고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는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02-735-8994), 여성긴급전화1366으로 연락하면 불법 영상물 삭제, 심층 심리치료, 상담·수사, 무료 법률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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