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8살 때 엄마가 말한 대로 했어?”
8살 딸이 눈에 눈물을 담고 외쳤다. 4월21일 온라인 개학 둘째 날. 아이는 아침 7시30분에 일어나 학교에 가는 것처럼 세수하고 양치하고 옷을 갈아입기로 한 약속을 하루 만에 지키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만화책을 뒤적거렸다. “세수해라”를 열 번 반복하던 나는, 결국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엄마는, 8살 때 일어나자마자 세수했어? 양치했어? 애가 그랬다고?” 아이는 지지 않고 따진다. 전쟁의 서막. 교무실, 강당, 보건실 등 사진을 오려 붙이며 생애 첫 학교를 온라인으로 만나는 딸아이가 짠하면서도 내 기준과 아이의 행동이 어긋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버럭이가 된다.
주입, 애원, 호소, 한탄, 폭발…
‘코로나19 가택감금’은 엄마의 민낯을 까발리는 중이다. 프리랜서로 간간이 일하며 심리학 대학원에 다니며 (지금은 온라인) 수업을 듣는 나는 초등학교 신입생인 8살, 유치원 신입생인 5살, 두 신입생의 엄마다. 24시간 아이들과 한 몸으로 지내며 집안일과 내 일과 가사노동, 돌봄노동이 완전히 뒤엉켜버렸다. 아이들이 어린이집, 유치원에 가는 시간을 이용해 내 일과 공부를 하던 시간의 칸막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는 어린이집이라는 무상돌봄 제도가 도입된 이래 국가가 확보해준 엄마의 시간을 다시 아이의 시간으로 회귀시켰다. 일하는 엄마들도 갑작스럽고 장기화된 돌봄기관 휴원과 학교 휴교에 휴가를 소진하고 재택근무에 들어가면서 일과 아이 돌봄과 집안일이 식탁 위에 헝클어져 포개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은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이제 유치원에 가는 멋진 다섯 살이잖아” “너 이제 멋진 초등학생이야” 같은 주입과 “이거 좀 스스로 하면 안 될까” 애원과 “엄마, 이거 마감해야 해” “엄마, 이거 지금 해야 해” 같은 호소의 단계에서, “엄마도 힘들다”라는 한탄과 “아, 좀 스스로 해” 같은 폭발로 말이다. 폭발 단계가 잦아짐에 따라 목은 아프고 자책은 두터워졌다.
이 뒤엉킴 속에 간혹 성공적인 날들이 있었다. 코로나19 사태 초창기였다. 꽃샘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하루이틀은 휴가 같기도 했다. 아이들과 늦잠을 자고 새 밥 말고 밥솥에 있는 밥과 달걀프라이와 김치로 아침은 적당히. 베개싸움, 이불싸움 하며 한바탕 뒹군 뒤 점심은 짜파게티를 해주면 아이들은 ‘엄마 최고’라며 엄지척을 하사했다. 이후 동영상 시청의 세계로 아이들을 안내하는 일과.
그러나 이것은 이벤트다. 월화수목금을 열심히 산 자들이 하는 일요일 이벤트. 이벤트가 아니어도 성공적인 평일은? 아이들과 집안일을 나누고 계획을 포기할 때다. 자, 같이 아침밥을 만들자. 5살 아이는 쌀을 씻게 하고 8살 아이는 콩나물을 다듬게 한다. 달걀프라이를 하기 위해 껍질을 깨다가 알맹이를 바닥에 떨어뜨릴 수도 있다. 부엌 싱크대 아래는 물 천지가 되고 아이들 내복도 다 젖지만 일단 포기. 아침을 차리는 데만 1시간. 초등학교 1학년 온라인수업 1교시가 끝난 뒤인 9시30분, 혹은 2교시까지 끝나고 10시30분에 밥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
여유 자본이 있어야 너그러움이
7살 딸이 있지만 재택근무가 오히려 자투리 시간을 찾아줬다는 직장인 친구의 노하우는 다음과 같다. ‘(책에서 말하는) 훌륭한 엄마’가 되겠다는 마음을 갖다버리기.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 중심부까지 출퇴근 시간이 왕복 3시간, 길이 막힐 때는 4시간에 달했던 그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사라져 출퇴근 시간에 가사노동에 해당하는 잡일을 했다.
아이에게는 늦은 기상과 늦은 취침을 허락했고 ‘1일 1영화’를 허용했다. 아이는 밤 12시에 자고 오전 11시에 일어났다. 친구는 11시까지 오전 업무를 마치고 1시간 동안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 아이와 신나게 먹고, 오후에는 100분짜리 영화를 한 편 틀어주고 그동안 오후 업무를 처리했다. 퇴근 시간 없이 바로 저녁을 만들어 먹으니 오히려 저녁에는 여유롭게 아이와 수다 떨며 놀 수 있었다. 물론 업무 전화를 할 때 아이 조용히 시키기, 노트북 앞에 와서 방해 공작을 펼치는 아이 협박하기 등의 가욋일들은 나열하지 않기로.
이 성공 사례들에는 많은 함정이 숨어 있다. 일단 엄마의 안정적인 심리 상태가 전제돼야 한다. 내가 성공적으로 보냈던 날은 대부분 마감이나 과제가 없어서 날밤을 새우지 않아도 되던 날들이다. 혹은 깊은 스트레스를 맥주 한 캔과 드라마 정주행과 역주행으로 풀며 올빼미가 되지 않았던 날들. 그래서 아이들이 당연히 하는 실수를 있는 그대로 보고 함께 치우고 정리하는 것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극소수의 날들이다. 친구는 출퇴근 스트레스가 사라져서 그만큼의 여유 자본이 생겼기에 너그러움이 동반됐다.
둘째는 아빠의 변함없는 직장생활이다. 대부분의 맞벌이 부부에게조차 재택근무와 아이 돌봄은 엄마 혹은 여성의 몫이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가 발행하는 여성 매체 <더 릴리>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재택 기간에 여성 학자들의 논문 제출은 줄고 남성 학자들의 논문 제출은 평소보다 50%가량 늘었다”고 보도했다. 고학력 전문직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도 돌봄노동은 여성 몫이 되고 그로 인한 커리어패스(경력관리) 유예 또한 여성이 감당하는 것이 현실 이다.
멋진 생존자가 되자
건강한 분노 표출은 마음 건강에 도움이 된다. 재난 상황을 맞아 슬기롭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시기를 힘겹게 보내는 모든 여성을 위해 나는 화산처럼 포효하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엄마 화가 지금 턱밑까지 치밀었어” “엄마 화가 지금 머리끝까지 나려고 하는데”라고 조금 절제해서 말하도록 애쓰려 한다. 아이들아, 엄마도 화날 이유가 있단다. 우리 함께 엄마의 화에 대해 토론하며 재난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내 멋진 생존자가 되자꾸나.
박수진 자유기고가 surisuri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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