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ôi muốn sự thật.”(나는 진실을 원합니다)
지난 4월4일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자 103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대한민국 청와대에 전달됐다. 베트남 꽝남성과 꽝응아이성 17개 마을의 희생자 유가족과 피해자 103명을 대표해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의 응우옌티탄(58·여)과 하미 마을의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응우옌티탄(61·여), 두 응우옌티탄은 ‘나는 진실을 원합니다’라는 뜻의 베트남어로 된 손팻말을 들고 청와대에 직접 청원서를 전달했다. 이들의 청원서에는 진상 규명과 공식 사과, 피해 회복을 위한 조처를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제1256호 표지이야기 참조)
이들이 청원서를 전달한 지 5개월여 만인 9월9일 국방부가 이들의 청원에 회신했다. A4용지 2쪽 분량의 회신서에는 “관련 사실에 대한 진상 조사가 먼저 이뤄져야 하나 국방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한국군 전투 사료 등에서는 주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역사적 사실 확인을 위해서는 한국 측의 단독 조사가 아닌 베트남 당국과의 공동 조사가 선행돼야 하나, 한국-베트남 정부 간 공동 조사 여건이 아직 조성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략) 다양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양국 여건이 조성되도록 국방부 역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과도 조처도 사실 인정도 없던 회신</font></font>
국방부의 이번 회신은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밝힌 최초의 입장이었다. 1999년 제256호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기사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이 처음 밝혀진 이후 과 한베평화재단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추진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도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뚜렷한 입장을 밝힌 적이 없다. 지난 20년 동안 이어진 침묵의 역사적 맥락에서 국방부의 회신은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회신 내용을 풀어보면 진상 규명과 사실 인정, 공식 사과, 피해 회복을 위한 조처 등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제시한 요구안이 사실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회신’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회신서를 통해 “국방부도 마음속 깊이 그 고통을 공감”했고 “대통령도 2018년 베트남 방문시 유감을 표명”했지만 정작 ‘한국군이 왜 가족을 죽였는지, 왜 자신을 쏘았는지 밝혀달라’는 이들의 진상 조사 요구를 한국 정부가 또다시 외면한 것이다.
정부의 소극적인 입장 발표에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반발했다. “국방부에서 보유한 한국군 전투자료 등에는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전쟁범죄 특성상 대규모 전쟁범죄가 한국군 전투 사료에 그대로 기재됐을 가능성이 작다는 게 시민사회단체들의 주된 입장이다. 전쟁범죄 사실을 공식 문서만으로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국가정보원(옛 중앙정보부)은 1969년 베트남전쟁 참전군인 3명에게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한 자료의 ‘목록’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가 진실을 밝히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학살 사건 조사 목록도 공개 않으면서…</font></font>
국방부가 회신에서 “공동 조사가 선행돼야 하나, 여건이 아직 조성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입장을 밝혔지만 실상은 한국 정부가 향후 베트남 정부와의 공동 조사에 대비한 일차적인 사전 준비나 선행 조사를 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베트남전 진상 규명 태스크포스(TF)에 속한 임재성 변호사는 인터뷰에서 “정부의 첫 답변 내용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답변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돼야 한다. 일본의 식민지 시기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정부가 주장한 피해자 중심주의가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국과 베트남 역사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사회 일동’은 9월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을 규탄하는 연명서를 발표했다. 한베평화재단에서 제안한 연명서에는 60여 개 단체가 동참했다. 이들 단체는 연명서에서 “최소한 청원인 103명이 진술한 사건에 대해서라도, 민간 전문가가 참여해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이 보관한 관련 사료를 검토하고 관련 참전군인의 진술을 청취하는 정부 공식 기구를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베트남 피해자들에게도 시간은 없어</font></font>
국방부의 회신서와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이 발표한 의견서는 베트남어로 번역해, 10월 초 학살 피해자 103명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대한민국 청와대에 청원서를 제출한 이후 한국 정부의 책임 있는 답변을 기대했을 고령의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은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해야 할지 모른다. 피해자들이 제출한 청원서 마지막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부디 한국 정부가 우리의 간절한 목소리에, 용기 내어 꺼낸 목소리에 응답해줄 것을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청원서에 서명한 학살 피해자들 가운데는 최고령의 93살 응우옌리도 있다. 1999년 민간인 학살 사건 피해자 9천여 명 가운데 100여 명의 목소리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을 때 증언자 중 한 명이었던 응우옌리는 이제 100살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이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을 만나 청원서를 받았던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는 9월26일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직접 청원서를 내러 한국에 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당시 들고 다닌 손팻말을 들고 다시 국방부 앞에 섰다. 이들의 요구에 한국 정부가 책임 있는 답변을 할 때까지 우리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과 함께하겠다.”
조윤영 기자 jy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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