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가 피해자로 인정받는 과정을 가시밭길로 만드는 게 바로 ‘무고’ 의심이다. 형사사건에서 허위 사실을 신고하는 ‘무고’(형법 제156조)는 흔한 일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무고는 유독 성폭력 사건과 자주 연관된다. 성폭력 피해 여성을 의심할 때 쓰는 ‘무고녀’라는 멸칭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2월 이 만난 부현정(34)씨는 ‘무고녀’라며 손가락질받고 있었다. 1심 국민참여재판에 이어 2심 재판부까지 그에게 무고죄 유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은 ‘성폭력 피해자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했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기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는 것으로 ‘무고’ 의심을 정면 돌파하던 #미투 운동의 한복판에서, 그 역시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공개(제1202호 ‘누가 부현정을 무고죄로 몰았나’)하겠다고 했다.
부씨 기사를 본 김용원 변호사가 항소심을 맡았던 이은의 변호사와 함께 상고심 법률대리인으로 나섰다. 그로부터 1년이 훌쩍 넘은 지난 7월11일 대법원은 부씨의 무죄를 인정하는 취지로 항소심을 파기환송했다.
부씨의 무고죄 대법원 판결(2018도2614)은 #미투 운동 이래 잇따라 등장하는 ‘성인지 감수성 판례’의 모범 사례로 꼽힐 만하다. 판결문은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법원 판결문에 등장한 2018년 4월의 판례(2017두74702)를 인용했다. 제자를 성추행한 대학교수에게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을 파기환송한 이 판결은 지난 2월 이 선정한 최고의 #미투 판결로 꼽혔다.
7월18일 기자와 만난 부씨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가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무고 누명을 씌운 판결문과 누명을 벗긴 판결문에는 어떤 성인지 감수성 차이가 있는지 살펴봤다.
‘피해자다움’은 없다항소심 재판부의 무고 유죄 인정 근거 6가지 가운데 3가지는 부씨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것과 연관된다. 항소심 재판부는 △부씨가 강제추행 가해자로 고소한 A씨와 술을 마시고 산책하는 등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고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보면 신체 접촉을 거부하거나 저지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강제추행을 당했다면서 편의점 직원이나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성폭력 피해 고소를 ‘허위’라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정반대의 판단을 내렸다. 항소심 재판부가 문제 삼은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은 고소 내용이 허위라고 인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손을 잡는 등 다른 신체 접촉이 있었다거나 ‘유형력 행사’(직접 폭행 외 심리적 고통을 주는 행위도 포함)나 협박성 발언이 있었는지, 강제추행을 당한 직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였는지 등은 피고인이 A씨로부터 기습 추행을 당하였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며 항소심 유죄 근거를 뒤집었다.
부씨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이 유무죄 인정의 근거로 쓰일 수 없음을 명백히 한, 2018년 4월 성인지 감수성 판례를 인용한 뒤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자가 처하였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아니한 채 진정한 피해자라면 마땅히 이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기준을 내세워” 성폭행 피해 사실을 쉽게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부씨의 비극은 CCTV가 없는 골목길 안 소파에서 강제추행을 당해, 직접 증거가 없다는 데서 시작됐다. 항소심 재판부가 주요 증거로 언급한 CCTV 영상은 강제추행 이전 상황이 담긴 것으로, A씨가 입수해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CCTV 영상은 두 사람이 화면에 잡힐 때마다 재생 속도가 느려지는(최대 4배) 등 편집 흔적이 있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이 아니라 보도로 드러났다.
대법원은 성폭력 고소 사건에 불기소처분 또는 무죄판결이 내려졌다는 이유가 무고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도 명확히 했다. 항소심은 무고의 유죄 근거 6가지 가운데 첫 번째로 성폭력 고소 사건 불기소처분과 부씨의 재정신청(불기소 결정에 불복하는 고소)이 기각된 점을 제시했다.
A씨 진술의 신빙성을 고려한 것도 항소심과는 크게 다른 대목이다. 항소심은 부씨를 무고로 고소한 A씨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 은 A씨의 진술이 △성폭력 혐의로 조사받을 때 △무고 고소를 할 때 △무고 재판 때 각각 달라졌음을 밝혔다. A씨는 부씨가 그를 강제추행으로 고소했을 때만 해도 ‘손만 잡았고, 키스는 없었다’고 진술했지만, 무고죄로 부씨를 고소한 뒤에는 ‘부현정이 애교스럽게 입맞춤하였다’고 주장하며 CCTV 영상 캡처(갈무리) 사진을 제출하기도 했다. 항소심까지 판사들은 A씨의 진술 번복 부분을 적극적으로 심문하지 않았다.
반면 대법원은 “무고죄 고소 과정에서 개진하였던 주장과 1심 법정에서 증언한 내용이 다르다는 점은 부씨가 기습 추행을 당하였다는 것이 객관적인 진실에 반하는 허위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게 한다”며 A씨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따지게 된 것은 #미투 운동의 결실이다. 1심 무죄판결을 뒤집고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는 7시간에 걸쳐 안 전 지사를 심문했고, 판결문에서 ‘피고인 진술 신빙성’을 별도로 따졌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남편의 지인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고소했으나 항소심까지 성폭행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한 부부가 함께 목숨을 끊은 ‘대전 성폭행 피해 부부 사건’에서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 판단이 강간죄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간접정황이 될 수 있다’는 판결문을 내놓은 바 있다.
‘무고’라는 집요한 의심과 부씨의 싸움은 계속될 것 같다. 대법원 판결 뒤 나온 많은 기사는 “서로 호감 있어도 기습 키스는 추행…무고 아냐” “손잡고 다녔어도 기습 키스는 추행…무고 아냐” 따위의 제목을 달고 있었다. 부씨는 김용원 변호사 명의로 잘못된 기사 제목의 정정을 요청하는 전자우편을 해당 언론사에 발송한 상태다. A씨가 자신의 부인과 함께 부씨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도 진행 중이다. 부씨는 A씨를 위증죄와 무고죄로 고소할 계획이다. 부씨는 각오한 일이라고 했다. “1심에서 유죄 받았을 때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감옥에 가는 것보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는 게 나한테는 낫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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