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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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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급여도 못 받게 하는 퇴사 갑질

강제 사직 시켜놓고 자진 퇴사로 둔갑시키는 회사들

입증책임 노동자에게 지우는 고용보험제도 손질해야
등록 2019-02-23 05:02 수정 2020-05-02 19:29
지난해 10월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실업인정신청서를 받기 위해 모인 이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에 실업인정신청서를 받기 위해 모인 이들. 연합뉴스

간호사인 해인(가명)씨는 병원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환자들을 돌보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마음에 들었다. 사명감 없이는 하기 힘든 간호 업무였지만, 고마움을 표하는 환자들을 만날 때면 피로와 스트레스가 사라지곤 했다. 실력 있고, 따뜻한 간호사로 살아가고 싶었다.

‛태움’ 견뎌보려 했지만 강제 사직

그런데 선배인 간호팀장의 괴롭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향정신성의약품 잠금장치가 열려 있다고 경위서를 쓰게 했고, 가르쳐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반성문을 써내라고 했다. 또 반성문을 제출하는데 반항하는 눈빛과 얼굴 표정이라고, 반성의 기미가 없다고, 다른 동료들과 의사 앞에서 모욕을 줬다. 반성문이 팀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해인씨가 보는 앞에서 반성문을 찢고 다시 써오라고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선배는 눈 밖에 난 해인씨의 일거수일투족이 불만이었다. ‘지적질’에 일관성이 있을 리 만무했다. 감정 기복이 심해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두려웠다. 간호 업무에 관한 괴롭힘만이 아니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하지 말라고 했고, 방문객에게 먼저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다. 병원의 누구누구와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했고, 왜 만났느냐고 추궁했다.

어느 날부터는 동료들이 따돌리기 시작했다. 팀장이 근처에 있을 때면, 동료 간호사들은 해인씨 질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한 동료가 찾아왔다. 팀장이 해인씨를 ‘왕따’시키라고, 하는 말에 대꾸하지 말라고 했단다. 팀장이 해인씨를 욕할 때, 어쩔 수 없이 같이 욕했다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그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간호사가 병원을 떠났다고 했다.

해인씨는 팀장과 잘 지내보려고 애썼다. 동료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헛일이었다. 이제는 아예 “사직할 거야? 부서 이동할 거야?”라고 물었다. 같이 일하기 싫으니 그만두거나 부서를 옮기라는 거였다. 해인씨는 사직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는 같은 질문을 계속했다.

해인씨는 그동안 당했던 고통을 정리해 간호부장에게 보내고 면담을 신청했다. 하지만 간호부장 역시 팀장 편이었다. “네가 뭘 잘하려고 노력했는지 난 1도 느껴지지 않아.” “반성문 써오라는 거 틀린 소리 아니라고 생각해.” 해인씨는 그만둘 생각이 없고, 열심히 배우겠다고, 눈물을 쏟으며 면담 자리를 나와야 했다.

해인씨가 돌아온 곳은 지옥이었다. 재가 될 때까지 ‘태움’은 멈추지 않았다. 고위 책임자를 찾아가 면담했다. 관리자는 해인씨의 고민을 들어주며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해인씨는 병원에 오래 다니고 싶다고 했다.

회사는 증거 자료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병동이 바뀌면 새 병동의 팀장이 괴롭혔다. 간호부장은 해인씨에게 사직서를 내면 바로 수리하겠다고 했다.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간호조무사 업무를 하든가, 죽어도 가기 싫은 부서로 가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병동 라운딩 중에 호출을 당했다. 한 시간 내에 사직서를 쓰라고 했다. 병원 관리자에게 문자로 사직서 강요 사실을 알렸지만, 어떤 도움도 없었다. 수간호사와 간호부장이 사직서를 내밀었다. 해인씨는 퇴직 사유를 원하지 않는 부서 이동, 간호조무사 업무 배치, 사직 권고라고 썼다. 눈물을 흘리며 병원 문을 나섰다.

며칠 후 고용보험 누리집에 들어가 이직확인서 처리 여부를 확인했더니 ‘부서 이동, 담당 업무 변경에 대하여 수용할 의사 없음으로 퇴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직장갑질119에 편지를 보냈다. 직장갑질119는 병원이 이직 사유를 정정해주면 좋겠지만,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관할 고용센터에 가서 ‘수급자격 인정 신청’을 하면서 권고사직임을 입증할 증거 자료를 제출하라고 했다.

병원에서 해인씨의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날 해인씨에게 강제로 받은 사직서가 아닌 다른 사직서였다. 필체가 달랐다. 병원에선 총무과 직원이 적었다고 했다. 해인씨는 증거 자료를 제출했다.

며칠 뒤 근로복지공단에서 ‘고용보험 피보험자격확인 청구서 처리 결과 알림’이라는 공문이 왔다. “간호부장을 면담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객관적인 자료가 없어 사실 확인이 불가”하다고 했다. “부서 이동 및 업무 변경에 대하여는 근로조건 변동에 대한 계속 근로를 위한 독려 차원의 표현이지 실제 퇴사를 권고하는 표현으로 보기 힘들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그래서 “권고사직으로 인해 퇴사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일하기 싫어 제 발로 스스로 나갔다는 것이다.

‘자진 퇴사’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고용보험법 시행규칙의 정당한 이직 사유는 근로조건 저하·임금 체불·최저임금 위반, 불합리한 차별 대우, 성적인 괴롭힘, 대량 감원 예정, 경영 악화에 따른 희망퇴직자 모집 등이다. 그 외에 “통상의 다른 근로자도 이직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다. 선배 간호사와 간호부장의 태움과 괴롭힘, 따돌림 때문에 ‘통상의 다른 근로자’처럼 고통당했고, 스스로 이직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사직서를 썼지만, 회사가 ‘자진 퇴사’라고 주장하면 입증책임은 오로지 노동자가 져야 한다.

실업급여는 퇴직 후 1년 안에 신청해야 하고 1년이 지나면 받을 수 없기에, 시간과 비용이 드는 행정소송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공단에 심사청구(행정심판)를 하고, 기각되면 재심사를 청구해 ‘자진 퇴사’가 아닌 ‘권고사직’을 인정받을 수 있다.

기어이 ‛자진 퇴사’로 만들고 마는 이유

직장갑질119 익명 단톡방(카카오톡 오픈채팅방)과 편지에 실업급여 문의가 줄을 잇는다. 사장, 직장 상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퇴사해도, 회사가 고용보험 피보험 자격 상실 이유를 ‘개인 사정’으로 적으면 실업급여를 받기 어렵다. 회사가 해고나 권고사직을 할 경우 일자리안정자금이나 청년내일채움공제 등 정부 지원금을 반환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을 해고하면서 기어이 ‘자진 퇴사’로 만든다. 현행 고용보험법상 ‘권고사직’을 입증하는 책임이 노동자에게 있기 때문에, 자필 사직서를 찍어놓고, 사직을 강요하는 대화나 카카오톡 내용을 저장해놓는 것이 중요하다.

근본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다. 고용보험 피보험 자격 상실 사유를 노동자가 쓰도록 하고, 입증책임을 사용자로 바꾸면 된다. 상사의 갑질 때문에 그만둔 노동자가 상실 사유를 ‛상사 괴롭힘’이라고 적었다면 실업급여를 지급하고, 회사에 ‘자진 퇴사’라는 사실을 증명하도록 하면 된다. 자진 퇴사가 확인되면 실업급여를 반환하게 하면 된다. 부정 수급이 많아질 것이라고? ‘쥐꼬리’만 한 실업급여 받으려고 멀쩡한 회사를 일부러 그만두는 직장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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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직장갑질119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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