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웃기고 울리는 쌍곡선 끝에 불이 켜졌다.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켜내기 위해 아슬아슬 전쟁을 벌이던 보통 사람들의 영화 . 영화를 따라가는데 아득한 저편 한 여자의 이름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자기 나라 말을 쓰지 못하던 그 시기. 불온하게 조선말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갔다던 선생님을 애잔하게 회상하던 제주 할머니들. 그들이 부르던 이름.
“태어날 때부터 여성은 동등한 인간이다. 이 사회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가득 차 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아이들의 부모를 설득해 공부하러 나오게 했다던 할머니들의 스승은 강평국(1900~1933). 33살로 요절, 끝내 조국의 광복을 맞이할 수 없었던 사람. 제주도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여성이자 동지인 두 여자가 있다. 고수선(1898~1989)과 최정숙(1902~1977). 모두 두 살 터울. 공교롭게도 새로운 세기의 여명에 나온 이 세 여자. 공통점이 많다.
제주섬에서 여자가 공부한다는 것조차 꿈도 못 꾸던 시절, 신성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 신학문을 위해 바다 건너 유학했고, 의학을 공부했다는 것, 귀향해서는 여성운동과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헌신의 생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들은 일제에 맞선 3·1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한 경성여고보 제주 3인방이다. 수감 생활, 취조, 가혹한 고문 등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는 “그날 밤 제주에서 유학하는 두 남학생이 비밀리 제주 학생 최정숙, 고수선, 강평국을 만나고 갔다”며 경성여고보는 남학생의 연락으로 기숙생 전원 70명이 5일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남대문역 앞으로 나가 데모에 참가했고, 그날 강평국 등 검속된 이들과 함께 있었음을 그의 저서에 기록하고 있다.
강평국. 일본국가를 부르며 졸업식에 참석하는 것은 치욕이라 생각해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고 귀향한 그는 제주 최초의 여교사였고, 외국 유학생이 됐다. 일본 동경여의전에 다니며 독립자금을 모으는 등 뜨겁게 활동했고, 근우회의 도쿄지회 임원으로도 일했으나 병을 얻고 고향에 스며들었다.
그렇게 격한 근현대사를 넘고 넘어서 지역에서 종교인으로, 의술을 베풀던 교육자로, 최초의 여성교육감이던 최정숙, 제주 1호 여성의사, 여성인권과 사회운동, 복지사업, 여성 최초로 정치에 뛰어들었던 고수선은 이 나라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하지만 오로지 독립이 화두였고, 격류의 생을 살다 간 강평국은 그의 치열한 시대정신에 비해 여성독립운동가의 반열에 아직도 오르지 못했다. 미혼이던 그에겐 후손이 없고, 부끄럽게도 과거사 정리와 후대의 조명이 희미했기 때문이리. 그는 또한 여권운동가이기도 했다. “왜 남자는 첩을 몇 명이나 둬도 아무 말이 없는데 여자는 한 번 개가하기만 해도 수군덕거리느냐. 도대체 이런 사회가 있을 법한 일이냐. 뭔가 크게 잘못됐다”며 개탄했다.
여성 필진이 드물던 1925년, 에 ‘여자 해방을 위한 잡감’이란 제목으로 연재했던 첫 문장은 “최형! 과거의 역사는 여자가 남자의 노예이다 함을 의미한 것에 지나지 아니합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도덕을 아니 법률을 작성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까 합니다”로 시작한다.
올해는 3·1독립운동 100주년. 과연 시대는 이들 섬의 한계를 벗어나려 몸부림쳤던 세 여자의 그 시대로부터 얼마나 진보하고 있는가. 빼앗겼던 시대, 말과 글을 찾으려 움직였던 보통 사람들처럼 이름 없이 묻힌 여성독립운동가가 얼마나 많은가. 여성들의 기록은 남성에 비해 발굴이 어렵다. 현재가 되어준 그들의 이름을 되찾고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는 한 역사는 진전되지 않는다. 어느 해보다 정부의 적극적 의지가 필요한 일. 강평국. 100년 만에 그의 고향 모교 동문 등에서도, 독립운동가 서훈 신청을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여 바란다. 그와 더불어 묻힌 여성독립운동가의 이름들이 비로소 이 땅, 저 땅에서 100년 만에 호명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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