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영방송인) 《PBS》가 보도한 내용이다. ‘북한은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실험하지도, 이전하지도 않겠다고 김정은이 말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을 언제든 만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나 역시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북한이 엄청난 경제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월2일 아침 8시11분(현지시각)께 소셜미디어 트위터에 이렇게 올렸다. 전날인 1월1일 북한이 등을 통해 공개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신년사에 대한 첫 반응이다. 북-미 협상은 지난해 10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이후 좀처럼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신년사는 북-미 관계를 포함한 2019년 한반도 정세를 내다보는 가늠자 구실을 할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지울 수 없는 또 한번의 역사의 깊은 발자취를 남기며, …민족사에 뜻깊은 사변들이 아로새겨진 2018년을 보내고 희망의 꿈을 안고 2019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한반도 평화는 불가역적이라는 메시지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를 이렇게 시작했다.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깊은 발자취’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지난해 3차례 남북 정상회담과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뤄낸 성과에 대한 의미 부여로 읽히기 때문이다. 2018년의 성과는 ‘역사’에 깊이 새겨져, ‘지울 수 없’다고 표현했다. 한반도 정세를 과거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 최고지도자는 해마다 1월1일 미리 녹화(녹음)한 신년사를 통해 새해 국정운영의 방향을 제시한다. 신년사의 구성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먼저 지나간 해의 성과를 짤막하게 평가한다. 이어 새해의 ‘으뜸 구호’를 제시하고, 국내 부문별로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다. 여기까지가 ‘대내용’인데, 대체로 신년사의 3분의 2 정도를 이에 할애한다. 신년사의 주요 ‘독자’가 북한 주민이란 뜻이다.
이어 ‘대외용’ 메시지가 등장한다. 통상 남북관계에 대한 평가와 전망, 사회주의 동맹국을 중심으로 한 대외정책 기조, 이어 미국을 비롯한 ‘적대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입장을 순서대로 밝힌다. 북한의 대외정책 기조를 분석·전망하는 데 신년사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올해 신년사 구성도 전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김 위원장은 2018년을 “대내외 정세에서 커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사회주의 건설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선 역사적인 해”였다며 “지난해 4월에 진행된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전화적 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계기”라고 평가했다. 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둔 지난해 4월20일 열린 노동당 중앙위 7기 3차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이른바 ‘병진 노선’(핵-경제 병행발전 추진)의 ‘완성’을 선언하고, ‘새로운 전략 노선’을 채택했다. 이를 두고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전체 인민이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할 데 대한 당의 새로운 전략적 노선”이라고 언급했다. ‘경제 건설 총력 집중’이 북한의 새로운 ‘지도 이념’이란 뜻이다.
김 위원장은 이어 전력, 석탄, 과학·교육, 문화·예술 등 부문별로 지난해 이뤄낸 성과를 평가했다. 특히 군수공업 부문에선 “경제 건설에 모든 힘을 집중할 데 대한 우리 당의 전투적 호소를 심장으로 받아안고, 여러 가지 농기계와 건설기계, 협동품들과 인민 소비품들을 생산하여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을 추동했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전략 노선’에 따라 군수공업 부문이 민수용 ‘경제 건설’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2019년 북한의 ‘으뜸 구호’로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사회주의 건설의 새로운 진격로를 열어나가자”고 강조했다. 특히 김 위원장은 “인민경제 전반을 정비 보강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국가적인 작전을 바로 하고 강하게 집행해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인민경제’는 북한 주민의 일상을 뜻한다.
앞서 김 위원장은 2011년 12월 집권 이후 여러 차례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첨예한 남북-북미 대립 속에 이렇다 할 성과를 내놓지 못했다. 2017년 신년사 때 김 위원장이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올 신년사에서 “인민생활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은 우리 당과 국가의 제일가는 중대사”라고 새삼 강조했다. 핵을 내려놓지 않고는 쉽게 이루기 어려운 과제란 점을 김 위원장도 잘 알고 있을 게다.
선이후난식 접근, 대북제재가 걸림돌김 위원장은 지난해 신년사에서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밝혔다. 후속 협상을 통해 문을 연 남북관계는 4월·5월·9월 3차례에 걸친 정상회담까지 내달리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단계로 진입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선 무장 경비 병력이 철수했고, 비무장지대에 전진 배치됐던 초소를 서로 철거하면서 남북을 잇는 11개의 오솔길이 생겨난 것이 이를 극적으로 상징한다. 김 위원장이 이번 신년사에서 “지난해는 70여 년의 민족 분열 사상 일찍이 있어본 적이 없는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격동적인 해였다”고 평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에 더 이상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를 열어놓으려는 확고한 결심과 의지를 담아 채택된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 공동선언, 북남 군사분야 합의서는 북남 사이에 무력에 의한 동족상쟁을 종식시킬 것을 확약한 사실상의 불가침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9월 평양 정상회담 직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은 ‘사실상의 종전선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2019년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제안도 내놨다. 첫째, “군사적 적대관계 해소를 지상과 공중, 해상을 비롯한 조선반도 전역에로 이어놓기 위한 실천적 조치”다. 둘째, “정세 긴장의 근원으로 되고 있는 외세와의 합동군사연습” 중단과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 장비 반입” 중지다. 셋째, “정전협정 당사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밑에 조선반도의 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다자협상” 추진이다. 지난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을 낮췄던 긍정적 조처를 지속·심화하자는 얘기다.
그간 남북관계는 사회·문화·경제 교류로 물꼬를 트고, 군사적 신뢰 구축 등으로 나아갔다. 쉬운 것부터 먼저 해 신뢰를 쌓은 뒤 어려운 것은 나중에 한다는 이른바 ‘선이후난’식 접근이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지속되면서 과거 ‘쉬운 일’이 되레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군사적 신뢰 구축 측면에서 남북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이런 정세가 만들어낸 ‘역설’이었다. 김 위원장은 내놓은 제안에 대해 ‘우리의 주장’이란 표현을 썼다.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어 이렇게 말했다.
“북남 사이의 협력과 교류를 전면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온 겨레가 북남관계 개선의 덕을 실지로 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당면하여…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
“북남관계 개선의 덕을 실지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하는 ‘평화가 경제다’란 구호와 맞닿아 있다. 다만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와 맞물려 있는 게 현실이다. 미국은 지난해 협상 국면에서도 추가적인 대북 독자 제재에 나서는 등 ‘최대의 압박’ 기조를 강화해왔다. 북-미 협상이 교착 국면으로 접어든 결정적 이유다.
북-미 관계에 대한 김 위원장의 언급이 이번 신년사의 핵심이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북-미 교착 국면을 뚫고, 1월 초로 예상됐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을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김 위원장은 먼저 “역사적인 첫 조미 수뇌 상봉(북-미 정상회담)은 지구상에서 가장 적대적이던 조미 관계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빨리빨리,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된다“6·12 조미 공동성명에서 천명한 대로 새 세기의 요구에 맞는 두 나라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고, 조선반도에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완전한 비핵화에로 나가려는 것은 우리 당과 공화국 정부의 불변한 입장이며, 나의 확고한 의지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미 더 이상 핵무기를 만들지도 시험하지도 않으며, 사용하지도, 전파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하여 내외에 선포하고,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을 취해왔다.”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은 1월2일 내놓은 분석 자료에서 “(북한이 김 위원장 집권 이후) ‘비핵화’를 구체적으로 지도자의 육성을 통해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김 위원장이 6·12 북-미 공동성명을 ‘순서’에 맞춰 나열한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북-미 관계→ 항구적 평화체제→ 완전한 비핵화’로 이어진다.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완전한 비핵화’를 맨 앞으로 가져오면서, 북-미 협상이 삐걱대기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이 핵무기 생산·시험·사용·전파(이전) 등 이른바 ‘4불’ 입장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도 의미가 크다. 북한의 선제적 ‘핵 동결’은 김 위원장이 언급한 ‘여러 가지 실천적 조치들’에 해당하는 핵·미사일 실험 중단, 함북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평북 철산군 동창리 위성발사장 폐쇄 등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김 위원장은 이어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의 주동적이며 선제적인 노력에 미국이 신뢰성 있는 조치를 취하며 상응한 실천적 행동으론 화답해 나선다면 두 나라 관계를… 빠른 속도로 전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미 두 나라 사이의 불미스러운 과거사를 계속 고집하며 떠안고 갈 의사가 없으며, 하루빨리 과거를 매듭짓고… 새로운 관계 수립을 향해 나아갈 용의가 있다.”
‘빠른 속도’와 ‘하루빨리’란 표현이 거푸 등장한다. 교착 국면에 대한 ‘갑갑증’을 내비친 게다. 김 위원장은 이어 많은 전제를 내걸고, 최대한 완곡한 어법과 조심스러운 표현을 써가며 이렇게 ‘경고’했다.
“다만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무엇을 강요하려 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에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 앞부분에서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깊은 발자취”란 표현을 썼다. ‘새로운 길’은 과거의 길이 아니다. 북-미 협상이 진척을 보이지 않더라도,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 재개 등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쪽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이유다. 뤼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빈대학 교수는 1월2일 한반도 전문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김 위원장이 경고한 ‘새로운 길’은 추가 핵실험이라기보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메시지로 볼 수 있다. ‘당신이 우리의 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한 유일한 해법은 아니다. 당신이 협력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당신을 무시하고 중국을 택할 수 있다’는 말”이라고 짚었다.
북한은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과 마찬가지로 북-중 정상회담도 3차례 열었다. 김 위원장 집권 이후 삐걱대던 북-중 관계는 완벽히 복원됐다. 지난해 10월 초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김 위원장의 방러 가능성이 유력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에 맞서 대북제재 유예·완화를 강조해왔다. 미-중 무역전쟁 속에 미-러 마찰도 지속되는 현실을 고려하면, 북한의 ‘새로운 길’이 중국과 러시아를 향할 가능성을 점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게다.
새로운 길, 핵무장 아니라 다른 파트너 찾는 길정부는 1월3일 오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었다.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 문제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해 10월 말~11월 초 시설 점검 등의 명목으로 개성공단 입주 기업인 150명의 현지 방문을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미국과 협의 과정에서 무산됐다. 정부는 개성공단 기업인의 현지 방문 자체가 제재에 저촉되는 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결국 북-미 협상 진전과 남북관계 개선의 ‘선순환 고리’를 찾아내는 게 새해 벽두 정부의 당면 과제다.
같은 날 북한 은 기명 칼럼에서 “북남관계는 조미관계의 부속물로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제재와 압박’을 내세워 미국이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이다. 신문은 “만일 국제경기대회에 참가한 마라손(마라톤) 선수가 미국 선수보다 앞선다고 하여 속도를 조절하라고 강요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 것 같은가. 대번에 미친놈의 수작이라는 질타가 쏟아질 것이다. 바로 그러한 강도적 논리를 지금 미국이 펴고 있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수위가 ‘조금’ 높아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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