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형우(가명)씨는 서울에 있는 한 사립대 대학원 석박사 통합 과정에 입학했다. 사람의 생명을 탐구하는 학문과 신약 개발로 사람을 살리는 연구를 하고 싶었다.
석박사 통합 과정은 3년으로 일반 과정(석사 2년+박사 수료 2년)보다 짧아 등록금이 적게 들었다. 연구원으로 기업이나 정부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학비와 생활비를 보탤 수 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3년 동안 3050만원 교수 주머니로 </font></font>연구실에는 선임인 방장 아래 10여 명의 연구원이 있었다. 형우씨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연구비를 받을 은행 통장을 만들었다. 비밀번호와 함께 통장을 방장에게 건넸다. 방장은 연구원들의 통장을 걷어 관리했다. 연구실에서 생활한 지 3개월쯤 됐을 때다. 교수가 방장에게 60만원을 찾아오라고 했다. 방장은 통장을 들고 은행을 다녀왔다. 그는 방장이 교수의 은행 심부름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방장은 교수가 대학원생 연구비를 가져가는 것이라며 한탄하듯 말했다. 너도 때가 되면 하게 될 거라고 했다.
1년6개월 정도 지났다. 형우씨 통장에도 연구비가 2천만원 넘게 쌓였다. 어느 날 방장이 이자가 많이 나온다며 증권회사 통장을 만들어 1천만원을 이체하라고 했다. 그는 군말 없이 돈을 보냈다. 증권회사 통장의 돈을 교수가 가져갔을 것이라는 얘기가 떠돌았지만, 그는 물어볼 수 없었다.
2017년 11월이었다. 방장은 교수 지시로 통장에서 돈을 찾았다고 했다. 확인해보니 11월10일 형우씨 통장에서 400만원이 지도교수 계좌로 이체되어 있었다. 일주일 뒤인 17일에는 400만원이 현금으로 인출됐고, 21일과 24일엔 각 500만원씩 현금 1천만원을 뽑아갔다. 통장 잔액은 4만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선배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2018년 새해, 프로젝트 사업에 참여한 연구비가 다시 통장에 조금씩 쌓였다. 형우씨는 돈을 찾아 등록금을 냈다. 선배들은 교수가 통장에 연구비가 얼마나 쌓여 있는지 확인하고 돈을 찾아오게 한다고 했다. 그는 본인의 다른 통장에 돈을 이체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가을이었다. 선배들이 졸업하면 형우씨가 방장이 된다. 선배는 그에게 통장 3개를 내밀었다. 선배 통장에서 300만원, 형우씨 통장에서 250만원을 현금으로 찾아 교수 통장에 입금하라고 했다. 증거가 안 남는 수법, 그는 통장을 들고 은행으로 내려가 임무를 완수했다.
형우씨는 3년 넘게 프로젝트에 참여해 받은 연구비 중 증권회사 통장 1천만원을 포함해 3050만원을 빼앗겼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학교를 떠난 선배는 5년 동안 빼앗긴 돈이 8천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학위를 받고 대학원을 나가면 통장에 남은 돈을 몽땅 교수에게 보내야 했다. 지도교수 아래 10여 명의 연구원이 일하고, 연구비 강제 입금은 최소 20년 가까이 진행됐다.
형우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박사 학위가 중요해도 연구비 강탈이 버젓이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딸 스펙 쌓기에도 대학원생 동원 </font></font>2016년 봄이었다. 지도교수는 연구원 5명에게 동물실험 프로젝트를 시켰다. 생쥐에게 스트레스를 받게 한 뒤 멜라토닌을 처치했을 때 생쥐 면역세포의 활성화를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연구실에서 형우씨는 생쥐를 매우 좁은 곳에 가둬놓거나 끈으로 묶어 스트레스를 일으켰다. 생쥐의 혈액과 장기를 꺼내 스트레스 지수를 확인했다. 실험은 6개월 동안 지속됐다. 그는 실험 데이터를 분석한 뒤 보고서를 작성해 교수에게 전달했다. 2017년 가을 연구논문이 나왔다.
5명이 동원된 연구는 교수 딸의 대학원 입학을 위한 것이었다. 교수는 그에게 딸 논문을 위한 거니까 너무 힘들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형우씨는 실험이 끝나고 인증샷을 찍을 때 말고는 딸이 연구에 참여한 것을 본 적이 없다.
한 선배는 교수 아들의 대학원 입학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를 썼다. 한 연구원은 교수 딸의 대학 봉사활동으로 책 한 권을 타이핑했다. 자녀 사랑이 극진한 교수는 대학원생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자녀가 유치원생일 때는 등하교를 시켰고, 초등학생 때는 그림일기를 대신 쓰게 했으며, 중·고등학생 때는 책을 던져주고 독후감을 쓰게 했다. 비참했지만 졸업과 학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연구실 절대 권력 앞에선 인격이나 존엄 따윈 없었다. 폭언과 모욕, 인격 비하에 시달려야 했다. 교수의 압박에 툭하면 밤을 새워야 했고, 빨간 날(공휴일)에도 연구실에 나와야 했다. 형우씨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평생의 꿈이던 연구자의 길을 포기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부모님도 생각해야 했다. 며칠을 갈등한 끝에 대학원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대학원을 떠나겠다고 하자, 한 선배가 연구비 통장에 남은 돈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를 비롯해 동시에 학교를 그만둔 4명의 연구원은 연구비 상납을 거부했다. 형우씨는 직장갑질119와 교육부, 국민신문고를 찾았다. “담당 지도교수의 부정부패와 갑질에 못 이겨 그만두려고 하는데, 후배들을 포함해 앞으로 이러한 피해자가 줄어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신고하려고 합니다.”
대학 사회에서 교수의 비리와 갑질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2018년 3월 정부 산하 연구기관과 기업체의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대학원생 인건비를 빼돌린 혐의로 서울 유명 사립대 교수가 구속됐다. 교수는 연구 과제에 참여하지 않은 대학원생을 참여 연구원으로 허위 등록했다. 자신의 지도를 받은 석·박사 과정 대학원생에게 인건비 통장을 학교 내 은행에 같은 비밀번호로 개설하도록 지시한 후, 선임 연구원을 통해 돈을 빼앗았다. 한 대학교수는 유명 국제학술대회 발표 논문에 아들 이름을 올렸다가 추천서를 쓴 교수가 ‘이름 끼워넣기’를 고발해 논문 발표가 취소됐다.
전국에 대학원생 수는 무려 33만 명이 넘는다. 고액 등록금과 쥐꼬리만 한 장학금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가장 지성적이어야 할 대학에서 각종 교수 갑질, 성폭력, 연구 저작권 강탈, 노동 착취가 만연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학원생도 근로계약 체결토록 </font></font>실험실에 속한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아침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한다. 팀별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회의에 참여하고, 행정 서류와 보고서를 작성한다. 개인사가 있을 땐 휴가를 낸다. 신분은 대학원생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연구원, 즉 노동자다.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22%인 4조3천억원이 대학에서 쓰이지만, ‘절대반지’를 가진 교수 앞에서 대학원생의 노동은 ‘학습’으로 둔갑한다. 정부는 대학원생 인건비 유용을 막기 위해 학과 차원에서 인건비를 한데 모아 일괄 관리하고 지급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대학이 대학원생들과 근로계약을 정식 체결하는 제도 도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하지만 법과 정부는 멀고 주먹(교수 갑질)은 가깝다.
직장갑질119와 대학원생노조가 노동전문가, 노무사, 변호사들과 함께 ‘대학원생119’라는 온라인모임(https://band.us/band/73590805)을 만들었다. 개인정보 보호를 철저히 보장하면서 교수의 갑질과 비리를 제보하고, 대학원생의 권리를 찾아나가는 모임이다. 2019년 새해, 교수 독재 왕국 대학원에 민주화의 새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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