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쇼 ‘침팬지 티파티’에서 확산된 침팬지의 인간화된 이미지는 영국의 차 브랜드 ‘피지팁스’ 광고로 이어졌다. 피지팁스 광고에서 차를 마시는 침팬지들. 유튜브 화면 갈무리
2016년 4월 영국 신문들은 한 동물의 부고 기사를 전했다. 초퍼스. 48살. 동물원에 살면서 광고 배우로 열연한 스타 침팬지.
텔레비전 광고에서 초퍼스는 동료들과 함께 양복을 차려입은 첩보요원이 되거나, 다림질을 하는 부인이 되거나, 하얀 말총 가발을 쓴 판사가 되기도 했다. 결론은 ‘아무리 바빠도 차를 마셔야지~’. 영국 차 브랜드 ‘피지팁스’의 이 광고 시리즈는 1956년 시작돼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 마케팅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침팬지들이 사람 흉내를 내며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내는 게 포인트였다.
대형 동물 연예기획사의 동물들배우는 초퍼스 혼자만이 아니었다. 루이스, 샘, 질 등 수십 마리의 어린 동료 침팬지들이 있었다. 영국 레스터셔의 트위크로스 동물원이 이들의 보금자리였다. 침팬지의 ‘연기’를 지도해 모은 돈으로 몰리 배드햄은 1963년 이 동물원을 세웠다. 1960년대 말 은퇴한 침팬지 배우가 18마리에 이를 정도로 침팬지 천국이었다. 침팬지들의 ‘몰입 연기’를 위해서 몰리는 평소에도 사람 아기들을 다루듯 침팬지들을 길렀다. 옷을 입히고 젖병을 물리고 텔레비전을 보여주고 샌드위치를 먹였다.
광고
몰리가 ‘대형 동물 연예기획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버려진 동물이 공급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침팬지나 오랑우탄 등을 집에서 키우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유인원은 새끼 때에만 ‘애완동물’로 적당할 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힘이 세졌고, 주먹 한 방에 자신이 날아가버릴 것을 직감한 사람들은 ‘괴물’이 되기 전에 동물을 버렸다. 펫숍에서 반죽음 상태로 전시되거나, 목줄을 찬 채 개와 함께 사는 동물들을 몰리가 거둬 스타로 키웠다.
사람들은 왜 너도나도 괴물을 길렀을까. 거기에는 근대 동물원의 뒤틀린 역사와 침팬지 티파티, 그리고 동물을 욕망하면서도 구별 지으려는 인간의 본능이 얽혀 있다.
인간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유사점을 발견하고 동시에 차이를 찾으려는 속성이 있다. 유사점에 매료되고, 차이에 공포를 느낀다. 귀여운 새끼 침팬지를 집에 들였다가 괴물로 변하는 걸 보고 버린 사람들처럼 말이다. 19세기 중반, 유럽에 근대 동물원이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유인원에 매료됐고, 침팬지와 오랑우탄에게서 원시적 형태의 인간을 찾으려 했다.
런던동물원에 침팬지가 들어온 건 1835년이었다. 열악한 처우를 받던 다른 동물과 달리 침팬지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아기(침팬지)가 상처 나지 않도록 모자를 씌우고 스웨터를 입혔네. 아기에게 간호사를 붙여주고, 아기는 간호사의 무릎 위에 앉았네. 그의 이름은 침팬지 토미.”(테오도어 후크의 시)
광고
1837년에는 오랑우탄이 들어왔다. 전담 사육사가 배치됐고, 역시 사람처럼 길러졌다. ‘제니’라는 이름의 이 새끼 오랑우탄은 사람처럼 차를 마셨다. “1842년 크리스마스 때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왕자가 런던동물원에 방문했을 때 (제니는) 스푼을 들고 차를 홀짝거렸다.”( 1905년 12월21일치)
동물의 인간화를 극대화해 한 편의 볼거리로 만든 것이 ‘티파티’였다. 1926년 런던동물원에서 처음 시작된 침팬지 티파티는 침팬지가 정장을 입고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일종의 인간 흉내 내기 쇼였다. 침팬지들은 유려하게 찻잔에 차를 따르고 티스푼으로 차를 저었다. 대개 대여섯 살 미만의 새끼들이 출연했다. 덩치 큰 성체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야수의 동물성 은폐한 ‘우아한 연극’침팬지 티파티(동물원에 따라 오랑우탄이 나왔다)는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세계 주요 동물원의 표준 행사가 됐다. 바다 건너 아일랜드 더블린동물원에서도, 미국 뉴욕 브롱크스동물원에서도 티파티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줄을 이뤘다.
티파티에서 킹콩은 사라지고 직립보행하는 푸들이 창조됐고, 사람들은 인간화된 이미지만 보고 새끼 유인원을 애완동물로 들였다. 야수의 동물성을 은폐한 ‘우아한 연극’에 대중이 속아 넘어간 것이다. 침팬지와 오랑우탄은 인간보다 대여섯 배 힘이 세며, 야생의 삶에서 인간 문명으로 납치됐고, 그들에게 강제되는 연극이 온몸을 비트는 노동이라는 사실을 응시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상상해보라. 당신이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에게 은하수 너머 행성으로 납치됐다. 문어가 당신에게 연극을 시킨다. 자기들은 수관으로 물을 뿜는 게 자연스러우니, 우리보고 하루 종일 물을 머금고 뿜어대라고 한다면?
광고
주목할 만한 것은 티파티가 구사한 서사였다. 침팬지가 인간과 비슷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공연이었지만, 절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어놓았다. 그래서 티파티는 침팬지가 차를 마시다가 우당탕 실수하고 난장판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런던동물원 큐레이터였던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에서 이렇게 평했다.
“침팬지의 지능을 봤을 때, 침팬지에게 차 마시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오히려 완벽한 테이블 매너를 구사하는 침팬지가 너무 품위 있게 보일 위험이 있었다.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동시에 버릇없는 행동을 하도록 가르쳤다.”
인간의 문화적 행동을 따라 하되, 인간의 자리를 넘봐서는 안 된다. 그것이 동물원의 유인원 강령 1조였다. 모리스는 침팬지의 지능을 보여줄 수 있는 다른 행동들- 공으로 목표물 맞히기, 자판기에서 음식 사기 등- 을 보여줄 수 있었지만, 대중의 인기 때문에 동물원이 티파티를 중단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티파티가 비윤리적인 ‘동물쇼’로 인식되면서 자취를 감춘 건 20세기 말 들어서였다.
새 삶을 시작했건만…트위크로스동물원도 1978년 사회적 변화에 맞춰 침팬지들의 피지팁스 광고 출연을 중단시킨다. (피지팁스는 유럽에서 침팬지를 들여와 2002년까지 광고를 계속한다.)
‘인간의 세계’에서 ‘동물의 세계’로 돌아간 침팬지들은 어떻게 됐을까? 단짝이던 동료 배우 ‘루이스’가 2013년 세상을 떠나자, 초퍼스는 ‘동물로 길러진’ 침팬지 무리로 보내졌다. 인간 손에 길러진 초퍼스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침팬지는 ‘적의 없음’의 표시로 손이나 입술을 내민다. 인간에게 자란 초퍼스는 그런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 3년의 악전고투 끝에 무리에 적응하기 시작했는데, 찬란한 과거를 지닌 이 침팬지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영국의 마지막 침팬지 배우는 그렇게 사라졌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산불 결국 지리산까지…사상자 52명 역대 최다
‘20대 혜은이’의 귀환, 논산 딸기축제로 홍보대사 데뷔
[단독] 박찬대, 국힘 제안 ‘여야정 협의’ 수용 뜻…“산불 극복하자”
‘입시비리’ 혐의 조민, 항소심서 “공소권 남용” 주장
대체 왜 이러나…대구 달성, 전북 무주서도 산불
이진숙, EBS 사장에 ‘사랑하는 후배 신동호’ 임명…노사 반발
심우정 총장 재산 121억…1년 새 37억 늘어
산불 왜 이렇게 안 꺼지나…최대 초속 25m ‘태풍급 골바람’ 탓
헬기 149대 총동원에도…“물 떠오면 더 커진 불길에 맥 풀려”
이재명 항소심 재판부 ‘표현의 자유’ 방점…허위 여부 엄격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