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는 밭을 간다. 말은 마차를 끈다. 그럼 원숭이에게 코코넛을 따오게 한다면? 2020년 7월 초, 원숭이의 코코넛 수확 노동을 두고 동물 정치판에서 한 차례 논란이 벌어졌다. 미국 동물단체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PETA·페타)이 원숭이 노동을 이용하는 코코넛 농장을 잠입 취재해 찍은 영상을 공개하자, 전세계는 코코넛밀크 불매운동으로 반응했다. 코코야자의 열매인 코코넛을 따다가 하얀 즙을 낸 것이 코코넛밀크다. 국경을 초월한 음식문화 덕에 한국의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코코넛밀크를 살 수 있다.
사람들이 불매운동에 나선 이유는, 코코넛밀크 생산 과정에 동물을 착취하는 비윤리적 노동이 개입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동노동이나 노예노동이 아니다. 동물노동이다!
적어도 수백 년은 된 원숭이 노동
페타는 타이의 코코넛 농장 여덟 곳, 코코넛 수확 기술을 가르치는 원숭이 학교 네 곳, 그리고 코코넛 따기 경연대회 한 곳을 취재했다. 야생에서 포획된 원숭이들이 조련받은 뒤, 강제로 나무에 올라가 코코넛 따는 노동을 강요당한다고 이 단체는 주장했다. 코코넛을 따지 않을 때는 무거운 타이어에 목줄이 묶여 있거나 좁은 우리에 갇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덧붙였다.
유튜브를 통해 원숭이의 고된 모습이 공유되고, 원숭이 노동을 이용해 만든 브랜드의 명단이 공개됐다. ‘웨이트로즈’ ‘부츠’ 등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과 미국의 식품업체는 잇달아 공급 중단을 발표했다.
코코넛 농장의 원숭이 노동은 적어도 수백 년은 된 것으로 보인다. 19~20세기 초 서구 탐험가들의 기록이 여럿 존재한다.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황금반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원숭이는 사나웠지만, 주인에게 순종적이었다. 약 15m 목줄에 묶인 원숭이는 절반은 길들여졌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정글로 돌아가도 될 거 같았다. 원숭이가 코코넛나무 위로 보내졌다. …나무 꼭대기에 오른 원숭이는 잎과 가지를 흔들어댔는데,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자, 잘 익은 코코넛 하나를 잡아 줄기가 끊어질 때까지 돌렸다. 그렇게 수확한 코코넛을 아래로 던진 뒤 자신도 내려가려고 했다. 원숭이는 아마 충분하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다시 일하라는 주인의 성난 목소리를 듣고선, 원숭이는 나무 위의 잘 익은 코코넛을 모두 수확하기 시작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도,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이르는 동남아시아 벨트에 코코넛 따는 원숭이들이 있었다. 1919년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목격 사례를 모아 기록했고, 1923년 <자연사>에는 코코넛 따는 원숭이는 8~20달러로, 애완용 원숭이보다 비싼 값에 거래된다는 내용이 실렸다.
‘코코넛 따는 원숭이’가 대중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윤리적 검토 대상이 된 건, 비교적 최근 들어서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건, 2015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활동하는 동물단체 ‘애니멀 플레이스’였다. 본격적인 현장 조사 없이 유튜브 등 미디어 사례를 분석해 미국의 공영라디오 <엔피아르>(NPR)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예의 그렇듯 잠시 들썩였다가 잠잠해졌고, 5년 만에 페타가 잠입 취재해 영상을 내놓은 것이다.
애정에 기반을 둔 유대도 쌓여 있다?
타이 정부는 지역 환경단체와 동물단체가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었다며 오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각국 영사관에 코코넛 노동은 동물학대가 아님을 설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동물학대를 주장하는 페타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은 없었다. 타이 일간지 <방콕포스트>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번 사태는 교묘한 사업(몽키 비즈니스)과 코코넛의 문제만은 아니다”라며 “타이 정부와 관련 산업계가 새롭게 바뀐 국제 경제 질서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에서 원숭이 노동을 조사한 영장류민속학자 레슬리 스폰셀(미국 하와이대학 교수)은 신중한 입장을 견지한다. 신체적 구속과 처벌이 원숭이 노동을 지배하지만, 생산성 향상을 위해 애정에 기반을 둔 유대 또한 쌓여 있다고 말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첫째, 코코넛 노동을 인간과 동물의 협력이라고 볼 것인가? 예전에도 썼듯이, 물고기를 함께 사냥하는 인간과 돌고래 등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과 동물이 직접적인 이익을 취하며 협력하는 일이 더러 있다(제1248호 참조). 그렇다고 원숭이 노동이 이런 사례와 등치라고 하는 건 무리다. 결정적인 차이는 원숭이 목에 달린 줄이다. 원숭이는 속박돼 있다. 자유가 없다.
둘째, 코코넛 노동자를 가축화의 전 단계로 볼 수 있을까? 밭 가는 소와 마차 끄는 말도 지난한 세월을 통해 인간의 땅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대형 초식동물 중 단 14종만이 가축이 될 수 있었다며, 가축화는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을 따른다고 한 적이 있다. 톨스토이가 쓴 대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나온 법칙이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불행한 사람은 단 한 가지 이유로 불행하듯이, 단 한 가지라도 맞지 않으면 야생동물은 가축이 될 수 없다. 가축이 되려면 종의 사회성, 서식지, 번식 용이성, 주변 환경 등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약 3천 년 전에 그려진 이집트 벽화를 보면, 원숭이가 무화과를 따는 모습이 있다. 아마 원숭이는 역사적으로 수십~수백 차례 가축화가 시도됐겠지만, ‘불행한 안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원숭이 노동 실태 조사부터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종적 질문 앞에 서 있다. 소와 말과 고양이와 개의 역사를 뒤로하고서, 지금 우리가 원숭이를 노동자로 부리는 것이 정당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사안을 입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를 포함한 근대인들은 동물의 땅과 인간의 땅, 야생과 문명의 경계선이 두부 자르듯이 갈린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원숭이 노동자는 정글 속을 헤치고 다니는 그 원숭이가 아니다. 코코넛과 고무 등 플랜테이션 농장의 확대로 원숭이는 서식지를 잃은 지 오래됐다. 일부 원숭이는 농장의 코코넛을 훔치고, 망고를 주워 가는 등 인간의 공간에서 빌붙어 살고 있다. 서구의 동물 접근법에선 이들을 순도 높은 ‘야생동물’ 아니면 ‘유기동물’로 정의하겠지만, 도시와 야생의 흐릿한 경계 지대에서 노동자로 도둑으로 거지로 사는 원숭이를 그렇게 정의하는 건 불충분하다. 타이 남부에만 원숭이 노동자 수천 마리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조차 추정일 뿐, 코코넛 농장에서 원숭이 노동자 실태에 대한 조사와 통계는 공백에 가깝다. 윤리적 논란에 답하려면 실태를 알아야 한다.
남종영 <한겨레>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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