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 먹는 건 괜찮아요.”
“정말요?”
“괜찮아요. 고통을 느끼지 않으니까.”
스타 요리사 알렉시스 고시어가 답한다. 2010년 영국 런던 소호 거리에서 비건 레스토랑을 연 그는 ‘비건 요리’로 굴을 내놓는다. 비건은 채식주의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 즉 고기는 물론 달걀과 생선을 먹지 않고 순수하게 식물성 재료만 먹는다. 그런 비건이 굴을 먹는다니? 굴은 동물 아닌가?
지난해 9월 고시어는 영국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음, 나에게 비건 요리는 생명에 대한 연민 문제이거든요.”
그의 말에 따르면, 굴은 고통을 처리하는 두뇌도 없고 진화된 형태의 중앙신경계도 없다. 현재의 과학 지식에선 굴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 먹어도 된다. 나의 식욕이 누군가의 고통을 불러오지 않으니까.
감정과 이성 사이굴은 문제적 동물이다. 한마디도 안 할 것처럼 조용하게 생겼지만, 동물윤리 논쟁에서 시끄러운 촉발자다. 알다시피, 저명한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는 1975년 에서 ‘고통을 느끼는 동물은 모두 평등하다’는 명제를 들고나왔다. 과거 인류는 노예에게 족쇄를 채워 가두고 그들을 ‘노동의 도구’로 사고팔았다. 노예가 흘린 피와 그들의 고통이 때론 감정적인 불편함을 주었겠지만, 당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노예제도는 비도덕적이라는 게 명백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통을 주면서 먹을거리, 입을 거리, 즐길 거리 등 도구로 이용하는 동물은 어떤가? 피터 싱어는 주장한다. 고통을 느낀다면 그 존재는 도덕적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지금 우리는 동물을 차별하는 ‘종차별주의’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싱어의 주장은 혁명적인 변화를 불렀다. 동물을 보호하는 운동이 그저 감정적 호소가 아니라 탄탄한 철학적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싱어의 이 선언은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잡고 싶은 꼬리표 같았다. ‘인간이 동물이 고통을 느낀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럼, 어떤 종이 고통을 느끼는데?’ ‘단순한 자극-반응 행동인 거 아니야?’ 등의 질문을 제기했다. 과학이 많이 해결해주었다. 이를테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호르몬을 측정할 수 있다. 개농장에 갇혀 사는 개는 중산층 가정에서 귀여움을 받고 사는 개보다 코르티솔 수치가 높다. 따라서 중산층 가정의 개가 덜 고통받고 더 행복하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동물운동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증거’를 요구했기에 이런 실험과 연구는 반박용으로 많이 쓰였다.
여하튼 과학자들은 묵묵히 연구했다. 인간과 비슷한 중앙신경계가 있는가, 고통을 주었을 때 회피 행동을 하는가 등 고통을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설정하고, 종을 늘려가며 실험했다. 인간에서 출발해 영장류, 포유류 그리고 최근엔 물고기, 급기야는 바닷가재까지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밝혀졌다.
새우와 굴 사이그러나 굴이 문제였다! 이 분야의 어르신인 피터 싱어도 굴 때문에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에서 굴, 대합조개, 홍합, 가리비 등은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새우와 바닷가재 등은 자극 회피 반응 등을 봤을 때 고통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우와 굴 사이가 의식적 존재와 무의식적 존재를 가르는 경계선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찜찜했는지 싱어는 2판에서 자신의 입장을 신중하게 조정했다. 굴이 고통을 느끼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으므로, ‘의심의 이득’ 원칙에 따라, 긴박한 이유가 없다면 안 먹는 게 좋다고 말한 것이다.
요즘 가장 뜨거운 시절을 보내는 동물권 이론가 스티븐 와이즈도 ‘분류학자’ 대열에 나섰다. 그는 유인원과 돌고래, 코끼리 등 인격체로서 특성을 가진 ‘비인간인격체’(Nonhuman Persons)는 인신 구속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며 동물실험 연구소와 동물원을 상대로 일련의 소송을 벌이는 변호사이기도 하다. 그는 동물행동학자 도널드 그리핀의 논의를 발전시켜 동물을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이 있고,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 그런 자신을 인식하는 자율적 의식을 가진 게 100% 확실하다면, 그 종의 자율성 지수(Autonomy Value)는 1이다. 이런 의식이 전혀 없는 게 확실하다면 0이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는 0.5이다.
이를 이용해 와이즈는 동물을 네 가지로 나누었다. 제1범주는 0.9 이상으로 자의식의 존재 여부를 알아보는 거울실험을 통과한 동물이다.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돌고래, 코끼리 등이다. 제2범주는 0.5 초과 0.9 미만인 동물이다. 고차원적인 자의식은 없지만 의사소통과 사고, 인지 능력이 있다.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 어류 등이 속한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의 존재 여부를 당분간 알 수 없는 동물을 제3범주(0.5)로, 자극에 단순히 반응하는 종을 제4범주(0.5 미만)로 묶었다.
냉소주의자들이 철학자들의 이러한 분류 시도를 조롱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들은 주장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종차별주의 아닌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동물은 먹어도 되나? 동물권에 호의적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구분법이 생명을 위계화하는 것 아니냐’는 토론이 이어졌다.
물론 여기에 대한 재비판이 있다. 자의식이 있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인지 구조를 가진 동물은 그렇지 않은 동물보다 고통을 더 크게 느낄 것이다. 고통의 크기를 중심으로 차이를 두는 것은 차별이 아니다… 음, 그만하자. 우리가 철학자가 아닌 이상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냉소와 열정 사이비건과 채식주의가 트렌드가 되어가고 있다. 반대편에서 그들을 조롱하는 ‘안티 비건’이 유튜브에서 세력을 얻는 걸 보고 놀랐다. 알렉시스 고시어는 손님 모르게 굴이 들어간 음식을 내놓지 않는다고 했다. 손님이 의심스러우면 굴을 먹지 말라는 것, 고로 ‘의심의 이득’은 굴이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먹을거리를 꼼꼼히 따지고 성찰하는 태도를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 피터 싱어, 스티븐 와이즈, 알렉시스 고시어에게 굴은 적어도 발로 차도 거리낌이 없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그들의 태도가 책상머리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열정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냉소주의자들이여, 연탄재 발로 차지 마시라. 다른 생명의 고통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신 적이 있었나?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 대선 막 올랐다…초박빙 승패 윤곽 이르면 6일 낮 나올 수도
3번째 ‘김건희 특검법’ 국회 법사위 소위 통과
‘살얼음 대선’ 미국, 옥상 저격수·감시드론…폭력사태 대비한다
9살 손잡고 “떨어지면 편입”…대치동 그 학원 1800명 북새통
한양대 교수들 시국선언…“윤, 민생 파탄내고 전쟁위기 조장” [전문]
미국 대선 투표장 둘러싼 긴 줄…오늘 분위기는 [포토]
백종원 믿고 갔는데…“전쟁 나면 밥 이렇게 먹겠구나”
패싱 당한 한동훈 “국민 눈높이 맞는 담화 기대, 반드시 그래야”
로제 ‘아파트’ 빌보드 글로벌 2주째 1위
“대통령으로 자격 있는 거야?” 묻고 싶은 건 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