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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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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여, 도망치라!

아프리카돼지열병과 가축 돼지 1만 년의 역사…

돼지를 가두면서 바이러스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돼
등록 2019-10-30 17:26 수정 2020-05-03 04:29
투발루 수도 푸나푸티의 공항 잔디밭에서 돼지가 거닐고 있다. 류우종 기자

투발루 수도 푸나푸티의 공항 잔디밭에서 돼지가 거닐고 있다. 류우종 기자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산으로, 경기도 비무장지대(DMZ) 일대에서 대대적인 멧돼지 소탕 작전이 벌어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바이러스를 죽이기 위해 비교할 수도 없이 큰 멧돼지(숙주)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다. 멧돼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리저리 도망치고 있다.

소탕 작전을 멧돼지 입장에서 생각해볼까? 멧돼지는 자신의 삶터에서 어미를 중심으로 모여 사는 사회적 동물이다. 총을 들고 숲에 들어온 침입자들을 보고, 멧돼지 가족은 도망쳤을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전쟁이 삶터를 덮쳤을 때 늘 따르는 사건처럼, 어미는 죽었을 것이고 새끼들은 어미를 잃었을 것이다. 멧돼지 처지에선 지금 자신들의 사회는 공습당했고, 혼란과 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돼지의 역사를 쓴다면, 2000년대 유럽과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인한 죽음 행렬과 인간의 소탕 작전은 고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다.

“발굽은 도망치던 동물의 유산이다”라고 미국의 환경 저널리스트 사이 몽고메리가 썼다. 발굽은 고속열차의 단단한 강철 바퀴와 같다. 몸무게를 지탱하고 박차고 달릴 수 있는 발굽 같은 장치가 있어서, 돼지 같은 유제류 동물은 포식자로부터 도망치며 살아남았다. 도망치는 것은 그들의 진화적 운명이다. 지금 멧돼지는 돼지 역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도망을 치고 있다.

도망치던 동물의 유산, 발굽

포식자의 위협에 맞서 빠르게 도망치던 돼지를 울타리에 넣은 건 적어도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돼지는 가축이 되기에 좋은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새끼는 길들이기 쉬웠고, 사람과 함께 사는 것에 쉽게 적응했다. 무엇보다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어서, 사람이 남긴 음식물쓰레기를 말끔히 해치웠다. 마을을 청소하며 살찌운 돼지는 나중에 고기가 되어 밥상에 올랐으니, 인간에게 이보다 좋은 가축은 없었다.

돼지에게도 신체적 변화가 나타났다. 얼굴이 평평해지고 두개골 앞쪽이 짧아졌다. 무엇보다 눈 밑에서 코에 이르는 누골이 짧아졌다. 늑대가 ‘퍼그'(얼굴이 평평한 개 품종의 일종)가 된 것처럼, 야생 멧돼지에서 지금 집돼지처럼 외양이 변했다. 유전자 변화로 ‘가축화'에 따른 신체적 변화를 드러낸 것이다(가축이 된 동물 종은 평평한 얼굴, 늘어뜨린 귀, 작은 체구, 작은 뇌의 특성을 보인다).

돼지를 사육하던 초기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사람들은 숲 안에 대충 울타리를 두르고 돼지를 풀어 길렀다. 돼지는 거기서 코로 땅을 파 보금자리를 만들고, 몸을 뒹굴어 진흙 목욕을 하고, 무엇보다 새끼를 낳아 가르치고 번식하면서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우리가 ‘양을 친다’고 하는 것처럼 ‘돼지를 친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의 돼지 사육 행위가 방목 행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런 사육 환경에서 돼지는 갇혀 지냈으나, 완전히 속박된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은 도망쳤고 자유롭게 다니는 돼지도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돼지를 보면 가만두지 못하는 지금과 달랐다.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는 200~300년 전만 해도 이런 자유로운 돼지를 흔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에 대항해 방벽을 쌓은 이곳(월스트리트)은 도살장이 많은 곳이었다. 돼지들은 죽음의 절벽에서 힘껏 도망쳤고, ‘월스트리트'의 벽은 돼지가 먼 길을 떠나지 못하도록 막는 울타리가 되었다.

어쨌든 이런 돼지는 이슬람 문화권을 제외하고 특히 서구사회에서 주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돼지를 “자연이 인간에게 준 만찬”이라 했고, 근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기가 되었다. 베이컨은 지금까지 가장 흔하고 값싼 고기다.

도미노처럼 차례로 무너지는 농장

돼지의 운명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폐쇄적인 공장식 축산업의 등장이다. ‘고기 공장'이라고 해도 무방한 이곳에서 돼지는 죽은 물건처럼 다루어졌다. 작은 공간에 수십 마리를 몰아넣고, 서로 물어뜯지 못하게 꼬리를 자르고, 단기간에 길러 도축해 고기를 만들었다. 어미 돼지는 ‘스톨'이라는 철제 감금틀 속에 들어가 새끼를 낳고 기른다. 몸을 돌릴 수조차 없는 공간이다.

새로운 시스템에서 인간과 돼지의 교류는 완전히 차단됐다. 공장식 농장 밖으로 도망치는 돼지는 없었고 농장은 온도, 습도, 먹이 급여까지 자동화돼 한두 명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돌아갔다. 과거의 돼지농장이 수많은 작은 배가 각자 항해하는 것이었다면, 현대의 공장식 농장은 거대한 크루즈선이 수많은 돼지를 싣고 항해하는 것과 비슷해졌다. 중앙집중 시스템으로 질병·위생 관리가 용이하고 안전해졌지만, 크루즈선이 한번 침몰했을 때 사회에 미치는 여파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컸다. 그 크루즈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됐고, 바이러스는 그곳을 타고 다녀서, 하나가 침몰하면 일렬로 세워놓은 성냥갑처럼 차례로 침몰한다. 사람들은 거대한 크루즈선의 침몰을 무서워한다. 전염에 본능적인 공포가 있는데다 한번 침몰하면 고깃값이 폭등하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 구속의 공간처럼 여겨지는 공장식 농장에서 도망친 돼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돼지들은 컨베이어벨트에 틈새가 보일 때마다 도망쳤다. 2018년 5월 경기도 안산 부근 서해안고속도로에 돼지 10마리가 출몰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도축장으로 가던 트럭에서 빠져나온 돼지들은 고속도로 주변을 도망치다 결국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2017년 12월 경기도 고양 자유로에서도 두 달 된 어린 새끼가 발견됐다. ‘동물권행동 카라’는 이 돼지를 데려와 ‘삐용'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2015년 구조한 도축장 탈출 돼지 ‘빠삐용'의 이름을 다시 붙여준 것이다. 이제는 돼지가 도망치기만 해도 화제가 된다.

주민들 쉼터에 돌아다니는 돼지들

약 10년 전, 남태평양의 외딴섬 투발루에서 열흘을 머문 적이 있다. 지리적 고립성과 적은 인구 때문에 이 섬에는 아직 자급자족인 경제 형태가 남아 있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공항의 활주로는 해가 질 때면 주민들 쉼터가 되곤 했는데, 돼지들이 그곳을 무질서하게 돌아다녔다. 햇빛에 검게 탄 소년이 찬 축구공이 굴러가던 잔디밭을 돼지가 가로질렀다. 돼지는 언젠가 누군가의 고기가 되겠지만, 적어도 그때만큼은 평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조류인플루엔자, 구제역 그리고 아프리카돼지열병까지 이제 가축전염병의 유행과 생매장은 현대사회의 일상이 되었다. 공장식 축산이 원인은 아니다. 바이러스는 공장식 축산 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식 축산의 문제는 오히려 바이러스에게 광활한 삶터를 펼쳐준 데 있다. 무엇보다 돼지들의 도망을 막았다는 데 있다. 돼지들은 도망침으로써 바이러스를 분산시키고 소멸시킨다. 그러나 공장식 축산의 폐쇄 공간은 그런 도망을 차단함으로써 바이러스 숙주들이 사는 거대한 행성이 되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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