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필리핀의 섬 보라카이를 처음 찾았다. 상상 속에도 없던 터질 듯한 아름다움, 지금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샘이 촉촉해진다. 섬으로 들어가는 밤배 위론 딸아이 주먹만 한 별들이 쏟아졌다. 바다는 한없이 투명했고, 사람들은 외할머니처럼 순박했다. 호텔다운 호텔은 단 하나, 주민들의 집이 숙박시설이고 식당이었다. 딸아이와 마을 아이가 어울려 해변에서 뒹굴었고, 옆집 청년은 자기 배로 섬 구경을 시켜주었다. 24년 전 보라카이는 가난한 천국이었다.
30년 전 보라카이가 살아났다10월26일, 보라카이가 다시 문을 열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시궁창”이라 비난하며 섬을 폐쇄한 지 6개월 만이다. 눈으로 보이는 바다는 예전의 투명함을 되찾았다. 필리핀 정부는 “30년 전 보라카이가 살아났다”고 선언했다. 은 지난 7월 제1220호에서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과잉관광) 문제를 심층 기획기사로 보도했다. 그때 제주 우도의 반면교사로 보라카이의 폐쇄 사례를 소개했다.
섬이 폐쇄되고 다시 문을 연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진 6개월 사이, 보라카이는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먼저, 400개 호텔과 식당이 문을 닫았다. 필리핀 정부가 엄격한 환경 기준을 새로 마련했고, 그에 못 미친 곳을 몰아냈다. 바다로 몰래 오물을 버리던 불법 배수구도 모두 철거했다. 이제 정상적인 영업허가를 받은 호텔은 157개에 불과하다. 보라카이를 찾는 관광객은 섬에 들어갈 때 영업허가를 받은 호텔의 예약확인서를 지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섬 입구에서 출입을 제지당한다. 대대적으로 도로도 넓혔다. 공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난해 보라카이를 찾은 관광객은 200만 명에 이르렀다. 연간 10억달러(약 1조1400억원)의 관광 수입을 올리는 사이, 하루 최대 4만 명씩 관광객이 몰리기도 했다. 쓰레기가 산더미같이 쌓이고, 해안이 마구 침식됐다. 필리핀 정부는 보라카이의 관광객 상한을 정하는 새 법규를 정했다. 아무리 많아도 하루 1만9200명을 넘지 못한다. 호텔 예약자 수로 관광객 총수를 통제한다는 방침이다. 보라카이에서 영업하던 카지노 3곳도 폐쇄했다.
보라카이가 문을 닫은 6개월 동안, 노동자 수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정부는 보라카이의 하루 노동력 상한도 새로 정했다. 최대 1만5천 명이 넘지 않도록 통제한다. 주민과 관광객, 노동자를 포함해 보라카이가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사람 수를 제한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오염원이기 때문이다.
도박도, 모래성 쌓기도, 구토도 금지보라카이 바다에서 30m 안쪽 해변에는 어떤 시설물도 들어서지 못하도록 했다. 바다 가까이 있던 기존 건물이나 시설물은 모두 철거했다. 가까운 바다에서는 수영 말고는 모든 물놀이가 금지된다. 제트스키 같은 물놀이 기구는 100m 바깥 바다에서만 이용할 수 있다. 빨대를 포함한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도 전면 금지되고, 섬 안에서는 초록색의 전기 지프니 자동차만 운행된다.
보라카이의 재개방을 보도하면서, 외신들은 “보라카이에서 파티가 사라졌다”는 점을 강조한다. 해변에선 술과 담배, 파티뿐만 아니라 바비큐 등 고기 굽는 행위가 모두 금지된다. 밤 9시 이후엔 불꽃놀이가 금지되며, 반려동물을 해변에 데리고 올 수 없고 의자와 파라솔도 해변에 설치하지 못한다. 모래성 쌓기도 금지되고,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구토를 해서도 안 되고, 카지노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도박이 금지된다. 흡사 경범죄로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던 한국의 1970년대가 연상되는 조처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파티의 섬’ 보라카이가 가장 재미없는 ‘금지의 섬’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제주의 반면교사 될까베르나데트 로물로 푸야트 필리핀 관광부 장관은 “누구나 보라카이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보라카이가 격조 있고 지속가능한 관광 모델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관광객이 욕구를 억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관광부는 보라카이에서 도로 확장 등 재정비가 완전히 마무리되기까지는 2년이 걸릴 것으로 내다본다.
현지 주민들이 새 정책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필리핀 일간지 는 최근 현지 취재를 통해 “보라카이 개방 이후 쓰레기가 거리에 쌓이고, 일회용 플라스틱도 여전히 쓰인다”고 보도했다. 주민과 상인, 호텔연합 등이 배제된 채 필리핀 독재정부가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극단적 처방이 과연 지속가능할지 지켜볼 대목이다.
공정여행단체 ‘이매진피스’의 임영신 공동책임자는 “필리핀의 관광정책이 관광객 늘리기에서 벗어나, 관광객 수와 호텔 수를 제한하는 관광총량제를 도입하고 일회용 플라스틱 등의 규제로 돌아선 것은 큰 의미가 있다”면서 “지속가능한 관광지를 만들기 위해 6개월 동안 새로운 정책을 연구해 보라카이에 실험적으로 적용한 것은 우리 제주도나 우도도 진지하게 살펴야 할 소중한 사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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