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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입시가 신앙이 된 정신병원

‘신 중의 신=내신’ 강남서 문제 유출

아등바등 키워도 ‘고작’ 강남 살 텐데
등록 2018-10-20 17:22 수정 2020-05-03 04:29
연합뉴스

연합뉴스

그 아비는 들키지 않을 것이라 믿었을까. 그것도 만인이 만인과 경쟁하느라 늘 서로를 주시하고 탐문하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말이다. 숙명여고 시험문제 유출 사건에 대한 경찰의 정황 발표를 보면서, 대체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그랬을까, 기가 막혔다.

부도덕한 범죄라는 인식은 애초 없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쌍둥이 딸들 석차 좀 올려 내신 좀 잘 받게 하고 싶었겠지. 그러다 두 학기 만에 수십 명씩 제치고 각각 이과, 문과 전교 1등까지 하게 만들었다. 정황이 사실이라면 모로 보나 도로 보나 제정신이라고 할 수가 없다. 부모 욕심에 자식 인생 망친 일이 허다하지만, 딸들마저 피의자로 입건됐다는 소식에 달린 댓글들은 동정의 여지가 없다. 엄한 처벌이 중론이다. 이 학교에 자식이 다녔던 전·현직 교사들도 수사하고 전국 모든 고등학교의 내신 비리를 전수조사하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신 중의 신이라는 내신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현직 교사가 쏘아올린 파탄의 신호탄이다.

최근 또 다른 아비를 만나며 경악한 일이 있다. 아들 입시에 유리하라고 강남으로 이사 갔다는 그는 흥미롭다는 듯 아이 학교의 일화를 들려줬다. 중학교 교실에서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학원 숙제를 하는데, 진도를 먼저 뺐거나 레벨이 높은 아이가 다른 아이의 문제지를 풀어주고 페이지당 5천원, 문제 몇 개당 1만원 돈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애들 머리 하나는 끝내주게 돌아간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이 저도 돈 벌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합디다.” 제 자식이 문제지 대신 풀어주고 돈 버는 아이가 되리라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교육 계통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현직 교수씩이나 되는 아비의 언행이었다. 그 자리에서 “아, 정말 미친 거 아니세요?” 못한 게 후회되어 몇 날 며칠 ‘이불 킥’을 했다.

어쩌자고 자식 입시가 신앙이고 법이 되었을까. 염치도 예의도 없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년 그 길만 달려온 부모들은 그것이 정말 이상해 보인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 같다. 강남 부동산값마저 같이 오르니 달리는 말에 채찍질이 된 형국이다. 입시와 부동산이 맞물린 거대한 ‘강남바라기’는 주변 동네까지 집어삼키며 ‘교세’를 확장해간다.

그들의 선택과 처신을 설명할 길이 없는 건 아니다. ‘개천에서 난 막내 용인 나는 공부만이 살길이라 노력했고 그 결과 엘리트 소리 들으며 노오력해서 겨우 강남 언저리에 집 한 칸 마련했는데, 강남 입성을 자축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어라? 물려받은 게 많은 이들은 너무 쉽게 비싸고 넓은 집 차지한 채 떵떵거리며 살고 있네. 출발선이 다르네.’ 부럽고도 불안하다. 점점 내면에 공포가 차오른다. 나는 물려줄 재산도 많지 않은데 어쩌나. 내 자식만 뒤처질 수 없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편법으로라도 레벨 높은 학원에 들어가고, 공부 못하거나 강남 살지 않는 친구는 사귀지도 말며, 시험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잘 봐야 한다….

이른바 ‘위신재’(소유자나 사용자의 위신을 세워주는 물건)로 떡칠 된 강남 언저리에서 아등바등 버티면서 가끔 만나는 동창이나 친구들에게 뻐기는 게 유일한 피로해소제다. 그들이 주로 하는 얘기는 우리 옆집은 뭐 하는 사람이고 윗집은 자식이 어느 학교에 다니며 뒷집은 재산이 얼마라는 것들이다. 강남에 오래 산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호들갑스럽게 말하지 않을 뿐이다. 원래 자기들은 그런 사람이라고 여긴다. 어느 동네에 사는지가 나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취향도 안목도 없다. 강남에 갇혀 살아서 그렇다. 대체 그렇게 자식 공부시켜 유명 대학 가고 유리한 직업 얻어 돈벌이 잘하게 하면 뭐하나. 고작 강남에 살면서 또 제 자식 공부시키겠지.

강남은, 거대한 정신 병동 같다. 시험문제 유출이 사실이라면 그 아비는 치료도 받아야 한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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