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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뺑뺑이’로 가자

학벌주의의 민낯을 드러낸 ‘조국 검증 대란’ 간절하게 바라노니…
등록 2019-09-12 12:23 수정 2020-05-03 04:29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월4일 출근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9월4일 출근하고 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이른 저녁 업무복 벗고 퇴근복으로 갈아입은 ‘직딩’들이 쏟아져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젊음과 ‘칼퇴’의 생기가 어우러지니 칙칙하던 거리가 환해졌다. 나도 모르게 “와, 이 길로 놀러 갈 수도 있겠네. 좋겠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문득 옆에 있던 아이에게 물었다. 영향력이 크지 않고 돈을 많이 벌진 못해도 기본 밥벌이는 되고 자기 시간도 확보할 수 있는 일이랑, 남들이 알아주고 돈도 제법 버는 대신 신경 쓸 게 많고 바쁜 일 중 커서 어느 쪽을 하고 싶냐고. 내 아이의 평소 품행을 보면 전자에 가깝다. 만족스럽게 잘 그린 백일장 그림을 깜빡 제출하지 않고 오다가, 고작 50m 거리를 다시 가기 귀찮아서 그냥 집에 들고 오는 아이다. 아이는 곰곰 생각하더니 “영향력 있고 바쁜 일”을 꼽았다. 의외였다. 이런, 네가 야망이 있었구나!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럼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육 노선으로 가야 하나. 대학도 잘 가야 하는 건가. 으아, 어쩌지. 한편 반가움도 없지는 않았다. 그게 어떤 일일까? 아이의 대답은 이랬다. “어, 심리학 연구소의 조수 같은 일.” 으, 응? 뭐?

아이는 심지어 태도도 공손하게 읊었다. “실험에 참여하는 분들을 안내하고 혹시나 긴장하거나 떨지 않게 도와주고 연구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전화도 친절히 받을 거야”라고. 내 아이가 이렇게 현실감을 장착한 ‘메타인지 능력’이 출중한지 몰랐다.

주변 친구들이 너나없이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겠다고 할 때 아이는 그 크리에이터의 매니저가 되겠다고 했다. 그 전에는 제1장래희망 사육사에 이어 제2장래희망은 TV 프로그램 김병만 담당 VJ였다. 김병만 아저씨가 적어도 ‘70줄’까지는 정글을 누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 아이는 이렇듯 나름 일관되게 ‘주변적일지 모르나 꼭 필요한 일’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연구실 조수를 하고 싶은 아이는(업무 내용을 보면 확실히 조교가 아니라 조수 맞다) 공교육에 충실하여 방과 후에는 뒹굴뒹굴한다. 눈이 얼굴 반을 덮는 순정만화 주인공들이 나오는 반짝반짝한 심리 테스트 책들과 나도 못 읽고 꽂아만 둔 번역서까지 두서없이 본다. 초딩 시절만 해도 친구들이 다 학원에 가버려 놀 아이가 없다고 울부짖었지만 이제는 그조차 포기한 것 같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 이유는, 아이 시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보내고도 불안할 수밖에 없어서다. 그 트랙에 일단 올라탄 이상 개인이 속도나 방향을 조절하기가 어지간해서는 힘들다. 돈 쓰고 올라타 불안하느니 돈 안 쓰고 불안한 쪽이 낫다. 허들 경기 같은 입시를 치르지 않고도, 불필요한 학력이나 스펙 인플레(거품)를 겪지 않고도, 아이가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 지금은 연구실 조수인데 다음에는 또 뭐를 희망할진 모르겠다. 뭐든 사려 깊고 친절하게 할 아이라 믿는다.

최근 ‘조국 검증 대란’에서 우리 사회 학벌주의의 민낯을 고스란히 느꼈다. 대학 입시를 둘러싼 엄청난 소동과 낭비를 절감했다. 많은 사람이 그 딸의 입시 과정이 불법이라서가 아니라 불법이 아닌 듯해서 더 속상하고 억울해했다. 따지고 보면 20만원짜리 종합보습학원 다니는 아이에게도 30만~40만원 과목별 전문학원에 다니는 아이에게도 50만~60만원, 혹은 그 이상의 컨설팅이나 과외를 받는 아이에게도 불평등과 특혜의 시비가 닿을 수 있다. 입시를 향한 불안과 경쟁을 동력으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공명정대하고 성찰력 있는 인사도 자식의 입시와 관련해서는 자원을 총동원하는 무한 경쟁의 블랙홀에 빠져버린다. 이건 몹시 잘못됐다. 출발선을 따지기 전에 허들 경기 자체를 없앨 수는 없을까.

나는 ‘입시, 뽑기 외에는 답이 없다’(제1254호 참조)고 주창한 바 있는데, 마침 대통령도 대학 입시 전반을 재검토하자고 당부한 마당이니 한 번 더 숟가락을 얹고 싶다. 염치와 간절함을 담아, 대학은 ‘뺑뺑이’로 가자.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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