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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김기우
내 아이는 께름칙한 감정을 잘 털어내며 모드 전환이 빠르다. 목 놓아 울 정도로 서럽고 억울한 일을 겪고도 곧 괜찮아지는 모습에 당황한 적도 많은데, 단지 어려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착해서도 둔해서도 아니다. 단순하고 뒤끝이 없어서다. 내가 열 살 무렵부터 40년 가까이 지니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것을 열 살짜리 아이가 떡하니 지닌 걸 보면서 ‘존재론적 질투’랄까 ‘부러움’을 느낀 적도 있다. 너는 참 잘 살겠구나, 싶어서다.
연말연시는 ‘나와 함께’ 보내는 게 제일 좋은 사람들은 이 심정을 알 것이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았는데 상대가 제3자와 같이 보자고 할 때 머릿속이 복잡해지거나, 친구와 만날 일에 설레다가도 그 만남이 미뤄지면 혼자 있을 생각에 더 설레는 사람들 말이다. 초민감자의 특성이라고도 하고 극내향인의 기질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은 그리 단편적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뭐라 이름 붙이기도 참으로 거시기하다. 여하튼 나는 그렇다.
국민학교 2, 3학년까지 손 들고 발표할 줄을 몰랐다. 지명당해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얼굴이 온통 새빨개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 내 성정이 불편했다. 더 어릴 때는 비위가 약해 툭하면 토했다. 주변에 몹시 미안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지겨웠다. 주변 사물과 사람에 대한 촉과 눈썰미는 타고난 면도 있겠지만, 이렇듯 불편하고 미안해하다 개발된 면도 있는 것 같다. 내 아이가 유치원에 갔을 때 토하지 않고 얼굴 빨개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다.
사람들 틈에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에너지 소모가 많은 사람이 있다. 조금이라도 붐비는 곳에서 나는 오작동하는 탐지기처럼 쉽게 방전돼버린다. 수많은 자극에 일일이 감응하기 때문이다. 난처한 감정이나 생각에 사로잡히면 벗어나는 게 몹시 힘들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더 무심한 척 활기찬 척 행동하기도 한다. 고장과 탈진을 거듭한 끝에 깨달았다. 좀더 용감해지자. 원치 않는 만남은 거절하거나 피하고, 접촉은 최소화한다. 불필요한 자극은 차단한다. 최근 내가 부모 돌봄에 애썼다며 누군가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고맙지만 사양했다. 애쓴 직후인지라 혼자 충전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서다. 옛 직장 선배인 A씨와 B씨, 둘 다 내가 좋아하지만, 심지어 그 둘도 가깝지만, 동시에 만나고 싶지는 않다. 대화의 절반은 허공에 흩어질 게 뻔해서다. 유난스러운 것 같아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것을 받아들이는 데 반평생은 걸린 것 같다.
대신 나는 집중력이 좋다. 일이든 사람이든 몰입을 잘하며 비교적 일정한 성취를 낸다. 지금 하는 돌봄 노동에도 잘 맞다. 나에게 맞게 처신하다보니 일상의 부대낌이 훨씬 줄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이 자신이 어떤 성정인지 잘 모르고 지내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적극적이고 외향적이며 두루두루 친한 관계지향적인 태도를 정상성 범주에 놓고 오랫동안 굴러왔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것은 방식이지 그 자체가 가치는 아닌데 말이다. 외향적이면서도 연대감 제로인 사람이 있고, 내향적이면서도 여차하면 마이크 잡을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때론 타고난 성정을 잃기도, 극복하기도 한다.
제 성정에 맞춰 사는 사람의 첫인상은 안정감이다. 나와 결이 다를지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상대도 자기 성정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서로 달라도 제 모습에 충실할 때 우리는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다. 새해에는 나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내 마음을 더 잘 표현하고 설명하려고 한다. 내가 나를 알리지 않으면 누구도 저절로 알아주지 않는다. 부모 형제도, 자식도 모른다. (늙은 부모는 더 모른다.) 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살피고 파악하려고 한다. 나와의 상호작용이나 내 시각에 갇히지 않는 게 핵심이다.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 두 가지를 잘해야겠다 생각하고서야 나는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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