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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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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발력’ 레벨 경신을 위하여

분별과 판단을 의탁하기 전,

부모들은 자력갱생하시길
등록 2019-12-12 11:17 수정 2020-05-03 04:29
추운 겨울날 근린공원에서 70대 노인이 운동에 여념이 없다. 연합뉴스

추운 겨울날 근린공원에서 70대 노인이 운동에 여념이 없다. 연합뉴스

첫눈 오는 날, 뒷산 약수터에 있었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냉장고 기사가 오는데 냉장고 속이 꽉 들어차 있어 제대로 점검될지 걱정이란다. 화재 위험 때문에 10년 이상 된 냉장고를 제조사들이 무상 점검해주는 중이었다. 부모님 냉장고는 25년 된 그 이름도 찬란한 ‘금성’이다. 냉장고 속은 더 찬란하다. 역사와 전통의 현장이다. 본인도 뭐가 들었는지 잘 모를 것 같은데 “내 살림은 내가 한다”며 아무도 손 못 대게 하는 엄마의 소신을 이길 수 없다.

몇 년 전 무료입장권이 생겨 찾은 다른 동네 사우나에서 탈의실 위치가 헛갈려 두 차례나 연속 여자 탈의실에 들어가는 바람에 ‘변태 할배’ 취급을 받은 뒤로, 원래도 깔끔한 성격의 아빠는 매사 더욱 조심하고 삼간다. 통화를 마치니 그새 눈이 더 흩날린다. 겁이 났다. 작대기를 하나 주워 살살 짚어가며 내려왔다. 문득, 아빠는 하루하루가 이런 마음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끄러질까 자빠질까 끝까지 무사히 내려갈 수 있을까…. (나중에 들었다. 친절한 LG 서비스 기사가 “별 탈 없고, 이만하면 깔끔하게 쓰시는 편”이라 말해줬단다. 그림이 그려진다. 노인 안심시키는 법을 아는 고마운 기사님.)

성정이 아빠와 반대인 엄마는 조심해야 할 것도 조심하지 않아서 한 번씩 자식들을 놀라게 한다. 무릎 절룩대는 걸 보다 못한 언니가 일부러 ‘원정’ 와서 함께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언니도 어깨 치료 중이다. 먼저 침을 맞은 엄마는 천군만마라도 얻은 양 의기양양해서 한의원 건물 지하에 있는 마트의 ‘미친 세일 데이’를 누볐다. 언니가 내려가 보니 배추를 다섯 통이나 사놓고 있더란다. 언니가 당황하며 이것만 나눠 들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씩 웃으며 당신 장바구니를 보여주기를, 이미 어른 허벅지만 한 무 세 통에다 두부, 호박, 참기름, 꽁치통조림 등등 미친 세일의 미끼 상품이 소복이 들어 있더란다. 평소엔 3만원어치면 배달해주는데 날이 날인지라 이날은 10만원부터 배달해준다 하고, 우군인 아빠는 전화를 안 받고, 가까이 사는 나는 마침 동네에 없던 터라, 언니는 막 쑥뜸에다 부항까지 뜬, 한의사가 절대 힘쓰지 말라고 당부한 왼 어깨를 오른 어깨와 나눠 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는데… 엄마 집까지 들어다드리며 그저 미친 세일을 원망할밖에.

나중에 내가 “엄마가 그 순간 서운해하더라도 그대로 반품시키지 그랬냐”고 하자, 언니는 자신의 모자란 판단력을 탓했다. 짐작대로 엄마는 다음에도 언니랑 같이 한의원에 가서 침 맞을 생각이 아니라 장 볼 생각에 부풀어올랐다. 맘 약한 언니는 몇 차례 더 어깨를 쓰게 될지 모른다. 나는 모른 척하련다. 언니가 힘들면 스스로 엄마를 설득하고 주저앉혀야 한다. ‘수발력’ 레벨 경신은 절로 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해야 하는 일과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구별해 처신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노쇠기에 접어든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물론 미리 주의하고 예방해도 덜컥 당황하고 좌절할 일이 생긴다. 최근 아빠는 무리해서 좀 먼 약수터에 다녀온 뒤 탈장이 되었고, 엄마는 모두가 우려하던 장거리 여행을 다녀온 뒤 방광염으로 앓아누웠다. 나무라거나 탓해봐야 소용없다. 이미 본인들은 더 속상하다.

엄마는 이제 여행은 자식하고만 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예약은 해드릴 수 있다고 했다. 아빠는 멀리는 말고 근교 어디 어디 정도만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눈 질끈 감고 호출 택시 전화번호를 드렸다. 나는 일상의 조력자이지, 이벤트를 위한 비서나 행사장 스태프가 아니다. 관계와 고민의 무게를 이해하고 되도록 나눠서 질 뿐 삶의 숙제를 대신 해주거나 나서서 해결해줄 수도 없다. 분별과 판단을 의탁하는 날이 오기 전에는 당신들 스스로 자력갱생했으면 좋겠다. 나는 나대로 내 성정과 역량을 가늠하며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더욱 잘 구별해 처신하겠다.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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