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매장에서 맘에 드는 구두를 발견한 아빠가 “낡으면 창갈이해주나” 궁금해했다. 나는 “밑창 닳을 때까지 신지는 않을 텐데…”라고 말했다. 얼마 전 여든 살인 엄마가 갱년기 타령을 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꽤 웃겼다. 약수터와 도서관을 오가는 게 주요 일과인 여든일곱 살 할배가 정장 구두를, 닳도록 신을 일이 있을까.
아빠는 지난해 가을 내 집 옆으로 이사 온 뒤 눈에 띄게 생활도 생각도 간소해졌다. 뭔가를 툭 내려놓은 느낌이다. 몸피는 줄고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해맑아진다. 가족 중 막내인 내 말을 비교적 제일 잘 (알아)듣는 편인데, 이빨 아픈 얘기랑 엄마 흉보는 얘기를 주로 한다.
엄마는 북적북적 붐비는 곳과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 조건에 맞는 자식이 있어 그 옆에서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번화한 데 살며 잘 돌아다니는 자식이 반길 리 있겠는가. 아빠는 고집부리는 엄마를 달래고 얼러 가까스로 이사를 ‘완료’했다. 그러고는 기력 소모를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자신을 초기화해버린 것 같다. 본격적인 ‘노쇠기’에 들어섰다.
이 시기는 아파서 드러눕는 ‘와병 시기’와는 다르다. 딱히 병이 있거나 거동을 못하는 건 아니나, 몸과 마음의 기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때다. 어지간한 일도 자신 없어 하고 꼭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 외에는 쉽게 까먹는다. 덩달아 분별도 판단도 자꾸 흐려진다.
가까이에서 부모의 노화를 지켜보는 일은 한 세계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과 비슷하다. 서서히 때론 느닷없이 무너지는 과정이 실시간 전개된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다. 서럽고 서글픈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다. 계절의 바뀜이나 역사의 흐름같이, 필연이다.
허나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몹시도 허둥댄다. 믿었던 관계나 익숙한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 습관적으로 매달린다. 전성기 때의 경험과 기억으로 자꾸 돌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현실 능력치와 맞아떨어지면 다행이나, 종종, 대부분, 엇나간다. 가령 자식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을 때 시비를 가리거나 가리는 척이라도 해주고 빠지면 될 것을, 앞장서 해결하려고 나서다가 더 큰 오해를 부른다거나(지인들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본인의 무리한 행동은 없었는지 돌아보거나 안 되는 일은 안 된다 여기면 될 것인데, 내 엄마는 몇 날 며칠 끙끙대거나 울화를 터뜨리는 식으로 자신을 피해자 자리에 놓아버린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그리되는 일이 있다.
그렇다고 엄마를 앉혀놓고 잘잘못을 짚어줄 수도 없다.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좌절하고 억울한 그 마음의 풍경을 먼저 살필 수밖에. 따지고 보면 우리가 아이에게 ‘자식 된 도리’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존재 자체로 예쁜 거지. 나이 든 부모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부모 된 도리’는, 비록 쪼그라들고 우왕좌왕하나,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일 터이다.
내 부모가 이나마 정신줄을 잡고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있다. 비교적 준비성 많은 분들이라 앓아눕거나 그 이후를 대비해 돈도 챙기고, 연명치료에 대한 의사도 밝히고, 묫자리까지 잘 마련해놓았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그 전 시기, 생각보다 길고 긴 노쇠기가 내 부모 앞에 놓여 있다. 마음이든 몸이든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때 하루하루 구체적으로 어떤 돌봄을 받고 싶은지 당신들 의사로 정해놓는 게 좋다.
얘기를 나눠보면 생각보다 막연하다. 자식이 많은 노인일수록 어떻게든 되겠지, 우애 좋게 해결해주겠지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내 부모도 예외는 아니다. 플랜A가 가까이 사는 내게 돌봄을 받는 것이라면, 만약을 대비해 플랜B도 마련해놓아야 한다.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하며 당신들의 의사를 다른 자식에게도 정확히 알리길 권할 생각이다. 모쪼록 내 부모의 노쇠기가 살금살금 천천히 진행되기를, 내가 괜찮은 조력자가 되기를, 그 과정이 평화롭고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김소희 칼럼니스트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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