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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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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의지의 산물

닮지 않은 사람의 모임 ‘친구’, ‘그런’ 친구가 갖고 싶으면 내가 ‘그런’ 친구가 되자
등록 2019-10-04 12:14 수정 2020-05-03 04:29
충북 옥천군 경로당에서 할머니들이 오순도순 얘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충북 옥천군 경로당에서 할머니들이 오순도순 얘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엄마가 친구들 흉을 봤다. 하나같이 챙겨주기만 바라고 안부 전화 한 통 먼저 하는 법이 없다고. 그러고 보면 소싯적부터 엄마와 가까웠던 분들은 유독 의존적이거나 기대는 성향이 컸다. 내 엄마가 문제해결형 인간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해결만 하고 빠지면 좋은데 생색까지 내야 하는지라(이모들 말로는 ‘왕비병’), 많은 이가 아쉬울 때만 왔다가 갔다. 그런데 여행지에서 만난, 먼저 전화 잘 하고 관심사 맞는 한 할매와는 당최 친해지려고 하지를 않는다. 이유인즉슨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푸하하하하. 말 많기로 따지면 엄마 본인만 할까. 내 시어머니가 “샘 많은 아무개 때문에 냄비 하나 산 것도 얘기 못한다”고 투덜대는 것과 통한다. 샘이 많기로는 내 시어머니도 만만치 않다. 자신과 닮은 성정일수록 유난히 잘 보이고 유난히 싫은 것 같다. 그것과 오래 부대껴왔다면 더 그렇겠다. 피하고 싶으니까.

때론 자신과 전혀 다른 성정이어서 맹렬히 투쟁하거나 못 견디기도 한다. 나는 ‘너 때문에 이러저러했다’는 말이 그렇게 싫다. 탓하는 거 같아서라기보다 ‘책임’을 씌우는 거 같아서다. 듣자마자 뒷목이 당긴다. 덩치와 목소리가 커서 눈에 띈 탓인가. 대학 새내기 때 1번이라 1등으로 오해받고 전혀 공부 잘하게 생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설에 오르다 이름이 팔려 학번 대표에 과대표까지 맡게 된 식이랄까. 나름 민감해서 그랬겠지만, 맘보와 깜냥을 넘어서는 일을 본의 아니게 벌이고 책임져야 했다. 철들면서는 그 모든 일에서 힘껏 도망쳤다.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예약했다, 너 주려고 만들었다는 식의 ‘걸고 넘어가는’ 표현이 여전히 목에 걸린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데 왜 같이 안 가? 왜 오지 않아? 같은 속내로 연결된다. 상대의 미숙함도 있겠지만 내 까칠함 탓이 크다. 그랬나보다, 그렇게 설명하나보다, 여기면 될 것을 이렇게 ‘치대는’ 것은 제 몫의 부담을 타인에게 씌우는, 제 자존심만 얄팍하게 세우는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고야 만다. 나도 참 고약하다. 그저 사소한 말버릇일 수도 있는데. 하여간 무책임하거나 어리광 부리는 (거로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는 ‘쥐약’이다.

예전 일터에 딱 그런 동료가 있었다. 주니어라고는 걔랑 나밖에 없는지라, 수많은 상사의 눈길을 받아내야 하는, 근태와 실적도 확연히 비교되는, 대략 난처한 처지였다. 꿈 많고 샘 많은 초짜 시절이니 불행은 정해진 수순이랄까. 게다가 그 친구는 어떤 면에서 무척 어리광쟁이였다. 당시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일터에서 몇 안 되는 여성으로서 만 명은 아니라도 열 명쯤은 대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버리기. 취향보다는 생존을 택했다. 우리는 한 쌍의 ‘좀비 커플’로 새벽까지 서울 마포와 서대문 일대 술집에 출몰하며 한 시절을 보냈다. 저절로 친해지기는커녕 안 맞다 못해 심지어 몹시 싫어하는 스타일이니 피차 맨정신으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렴, 인간이 의지와 알코올로 솔메이트(영혼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굳이 술이 아니라 과메기나 SF나 트레킹이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둘 다 확실히 젊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젊으면 성취를 얻으려는 접근 동기가, 나이 들면 위험을 줄이려는 회피 동기가 승하다고 하는데 깊이 수긍이 간다. 그때 기력을 너무 많이 써서인지 지금까지 친구가 별로 없다.

관계는 우연과 의지의 산물이다. 부모자식도 따지고 보면 ‘내 것’이기에 소중하다. 친구도 그렇다. 닮은 성정이든 반대든 아끼고 살피면 친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내가 그런 친구가 되면 된다. 지난 추석에 LA갈비가 먹고 싶댔더니 친구 K가 친정 냉장고를 뒤져 ‘과묵하게’ 쓸어다주었다(차마 훔쳐다주었다고는 말 못…). 아주 맛있었다. 고마워 K. 네 엄마에게 홍삼 짜는 기계 터무니없는 값에 팔아먹은 그 사기꾼은 함께 응징하자꾸나.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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