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씨는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알아보다 대구기계부품연구원 공채 공고를 봤다. “지역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개발한 기술을 기업의 생산과 사업화로 이어주는” 연구원에서 일해보고 싶었다. 대구시 파견 공무원이었던 이아무개 기획경영실장은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고 말했다. 2007년 4월30일 기획경영실에서 계약직 행정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대구 토박이로 대구에서 가장 큰 연구원에서 일한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그의 업무는 이노카페(Inno-Cafe) 운영이었다. 이노카페는 지역 내 산·학·연 전문가들의 비공식적 의견 교환 장소로,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기관으로 당시 유행이었다. 그런데 연구원은 그에게 이노카페 업무와 기획경영실 일반 행정 업무를 시켰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 된다더니첫 근로계약은 12월31일까지 8개월이었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1월1일~12월31일 1년 단위로 계약했다. 수정씨가 연구원에 입사한 해 7월1일,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이 시행됐다. 법에 따라 2009년 4월30일이 되면 정규직으로 전환돼야 했지만, 연구원은 매년 계약을 갱신했다. 수정씨는 기간제법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2010년이었다. 수정씨보다 조금 먼저 입사한 남자 계약직 3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는 입사순으로 정규직 전환된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일했다. 2012년 2월까지 기획경영실에 근무했고, 이후 기계로봇본부·중소기업지원본부·뿌리산업혁신본부 등에서 행정 업무를 했다.
2013년 1월이었다. 연구원에서 그를 포함해 계약직 4명에게 자택에 대기하라고 했다. 수시로 전화를 걸어 업무를 지시했다. 출근해서 업무를 보기도 했다. 연구원은 퇴직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중간 정산을 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 했다. 계약직 4명이 퇴직금을 받았고, 전원 다시 입사했다.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 계약을 했다. 5월1일부터는 1년 단위로 계약서를 썼다. 기간제법을 위반해 계약직을 쓰다 법률 자문을 받고 황급하게 퇴직금을 지급한 것이었다.
2014년 4월이었다. 연구원이 내민 계약서에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4조”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사업의 완료 또는 특정한 업무의 완성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경우’는 정규직화의 예외조항이었다. 근로계약서에 수정씨 업무가 ‘정규직 전환 예외’라는 것을 적어 기간제법 위반을 피하려 한 것이었다.
2010년 이후 정규직 전환은 없었다. 회사가 정규직 채용 공고를 내면, 사내 계약직이 응시해 정규직으로 뽑혔다. 2015년이었다. 수정씨는 권아무개 기획경영실장에게 정규직 채용에 응시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남자를 뽑을 건데 여자인 네가 지원하면 안 되지.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서류를 내면 서로 곤란해지지 않겠어?” 그는 황당했지만 계약직마저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원서를 내지 못했다.
불법 계약에 성차별 만연인사담당자들은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줘야 하기 때문에 절대 여성은 뽑지 않는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2010년 이후 남성 계약직은 15명이 정규직이 됐는데 여성은 1명도 없었다. 연구원은 프로젝트에 따라 필요한 인력으로 위장하기 위해 7개월, 3개월, 6개월, 1년씩 계약을 맺은 뒤 2018년 6월30일자로 수정씨를 해고했다.
연구원의 갑질은 정규직 전환에만 그치지 않았다. 올해 수정씨는 스트레스로 돌발성 난청이 심해져 절대 안정가료(심신을 편안히 해 치료)가 필요해 며칠만 병가를 쓰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지난해에도 허리디스크 검사를 위해 이틀만 병가를 내겠다고 했다가 퇴짜 맞았다. 정규직은 허리디스크로 한 달씩 병가를 썼다. 연휴에 연가를 붙여 썼다가 1시간 넘게 훈계를 들어야 했다.
2년마다 주는 건강검진비 20만원도 비정규직에겐 주지 않다가 지난해 처음 지급됐다. 가장 큰 차별은 연 2회 성과급이었다. 계약직에겐 정규직 최하 직급이 받는 금액의 50%만 줬다. 능률성과급은 프로젝트 사업이 끝나고 두 달 뒤 지급됐다. 주도적 역할을 하고 100% 참가한 계약직은 사업 종료 뒤 계약이 해지돼 성과급을 받지 못했다. 1년 육아휴직을 신청한 비정규직에게 계약 만료일에 맞춰 9개월만 휴직을 줬다.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연구원에는 회의비가 넘쳐났다. 1천만원이 넘는 사람도 있었다. 부서별로 일주일에 2~3일씩 회식을 했고, 술자리에 노래방까지 이어지는 일도 많았다. 신체를 만지는 강제추행과 음담패설이 끊이지 않았다.
연구원은 6월30일부로 계약이 끝났다며 수정씨를 해고했다. 해고 직후 과학기술인공제회에서 퇴직을 확인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까지 12번의 계약 해지와 갱신을 하는 동안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연구원 인사담당자는 한 번도 퇴직 처리를 하지 않았다. 그는 11년2개월 만에 해고를 당한 것이었다.
수정씨는 억울했다. 직장갑질119에 편지를 보냈다. 직장갑질119의 답변은 간단했다. 수정씨는 기간제법 적용 예외사유에 해당하지 않아 근무 2년이 되는 2009년 4월29일 이후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자, 즉 정규직으로 간주된다는 것이었다.(대법원 2017. 2.3. 선고, 2016다255910) 그는 ‘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노무사를 소개받아 부당해고 진정을 냈다. 최근 경북지방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라고 판정했다. 그런데 연구원이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청구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대구기계부품연구원은 9년 넘게 불법으로 계약직을 썼다. 기간제법 제4조 위반, 상여금 등 차별대우는 제8조 위반이다.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등 불법이 한둘이 아니다. 반성하기는커녕 국민 세금으로 부당해고 사건을 중앙노동위와 법원에 가져갈 모양이다.
대구지노위 부당해고 판정직장갑질119는 공공기관 갑질 사례를 모아 10월 중순께 발표한다. 정부가 공공기관 갑질 근절 의지가 있다면 대구기계부품연구원 같은 공공기관을 특별감사해야 한다. 무관용 원칙으로 기관장과 가해자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갑질을 근절할 수 있다.
수정씨는 법적 소송에서 이겨 연구원으로 돌아가도 집단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이다. 하지만 갑질과 차별에 시달리다 연구원을 떠난 동료들,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모멸감에 시달리는 후배들을 생각하며 용기를 낸다. 갑질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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