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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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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이 깊은 기억, 아무도 모릅니다

허영선 시인이 만난 제주4·3 피해 생존 여성들

여성들의 파괴된 삶이 증명하는 참혹한 역사
등록 2018-03-20 14:45 수정 2020-05-03 04:28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일이지.” “자식들도 몰라야 할 일이지.” “그땐 눈물도 나지 안 헙디다.”
눈물마저 죄가 되던 시절. 그렇게, 제주4·3의 시기를 살았던 이들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깊은 고통을 간직한 이들이 있다. 4·3의 복판을 맨몸으로 관통한 여성들이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살아낸 그들은 몸에 벼락처럼 가해진 참혹한 트라우마 속에 산다.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4·3 광란의 바람에 휩쓸렸고, 희생당했던 여성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4·3 70년. 아직도 흐르지 않는 세월을 가슴 깊은 우물에 담그고 사는 사람들. 과연, 그들의 기억을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 _편집자
한 여성이 토벌대에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성의 손짓이 다급하다. 한겨레

한 여성이 토벌대에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성의 손짓이 다급하다. 한겨레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안 해서, 결혼한 여성은 했기에 제주4·3이 몰고 온 폭풍을 비껴갈 수 없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옥의 기억은 이들에게 가해진 성폭력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치욕’을 증언하는 당사자는 거의 없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성을 잃는 것은 목숨만큼 위태로운 일이라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일까.

4·3 때 열여덟이던 한 할머니는 토벌대에 당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했다. 그가 자신의 기억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다. “요즘 텔레비전에 누구누구한테 당했다는 얘기 나오면 가슴 덜컥해. 잠이 안 와.” 그는 지금도 자신을 가해한 군인의 얼굴을 기억한다. 일본군 ‘위안부’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영상을 안방에서 볼 때도 늙은 가슴속이 스멀거린다. 오래된 흉터처럼.

누구에게 호소할 수 없는 성적 유린을 당한 여성들이 입은 상처는 후유장애로 편입되지도 못한다. 내면의 고통을 겹겹 포갠 채 살아갈 뿐이다. 4·3의 여성들에게 가해졌던 몸의 기억, 가족의 안위를 위해 받아들여야 했던 강제결혼 등 여성들을 둘러싼 기억은 목격자의 입을 통해 어렴풋 세상에 공개되곤 한다.

달빛을 보라 했다

1948년 12월, 4·3 초토화 시기, 표선면 토산리 집단학살 현장에서 토벌대는 여성들에게 달빛을 보라고 했다. 달빛에 비춰 여성들 여럿을 뽑아갔다. 살아 돌아온 이는 열다섯 소녀뿐이었으나 소녀는 이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성담을 쌓다가, 토벌을 피해 도망치다가, 느닷없이 총상을 입고 후유장애의 삶을 사는 여성들은 어떤가. 턱을 날려버린 총상을 입고, 평생 무명천으로 턱을 싸맨 채 살던 진아영은 홀로 기억과 싸우며 신음하는 생을 살다 숨졌다.

그 광풍을 온몸으로 맞았던 양복천을 기억한다. “이제 그런 사태 온다 하면 죽지. 살 생각이 없어. 어떻게 살아.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입니까. 지금도 꿈에 나와. 이제도록 어찌 무슨 힘으로 살아졌는지.” 2009년 당시 93살이던 그는 몸서리치며 기억의 필름을 돌렸다. “3살 딸 등에 업고 10살 아들 옆에 섰어. 난 박박박 털멍 ‘선생님 날 살려줍서’만 하고. 올레 밖으로 도망가려는데 바로 총이 아들한테로 가버렸어. 아들이 ‘엄마아 엄마야’ 하니깐 ‘저거 아직도 안 죽었네‘. 팡 쏘안. 첫 총에 죽었수다. 차마 사람이 사람을 죽이랴 헷수다. 팡! 허난 셋이 마당에 엎어진 거라.” 순식간에 마당은 선혈로 낭자했다.

그의 등허리에 명중한 총알은 옆구리로 튀어나왔다. 등에 업힌 딸의 다리가 그 총알에 맞았다. 그날은 딸의 세 번째 생일날이었다. 그날 입은 상처로 평생 후유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던 딸 김순여. “곱은다리서 함덕장으로 갈 때는 마을에서 놀던 아이들이 놀렸지요. 기어서 가니까.” 딸이 자라면서 고통은 커져만 갔다. 어머니는 딸을 업어서 등교시켜야 했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힘들면 앉아서 모녀가 함께 울었다.

“예쁜 신발 한 번만 신어봤으면 하는 건 꿈이었죠.” 딸은 열여섯부터 발등으로 걷기 시작했다. 사십 대가 되니 옆으로 절뚝거리며 걸었다. 어머니는 속으로만 울었다. 오십 대가 돼서야 남편의 권유로 수술을 받았다. 그가 그랬다. “마음에서 없어질 상처는 아닙니다. 아무 친구한테도 말 안 했죠. 친구들은 소아마비로만 알았지요. 죽을 때까지 갖고 갈 상처지요. 남들과 함께 걸어보지 못한 거,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고문 역시 지울 수 없는 흔적이었다. 그들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날 고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생을 살다 간 고난향. 그는 생전에 비행기 소리만 나도 쿵쾅, 심장이 벌렁거려 잠을 이룰 수 없다고 구술했다. 전주교도소에서 10개월 옥살이를 했던 그다.

“남편 없다는 이유로 집에 와서 마을 공회당으로 끌고 갔어. 며느릴 걸상에 가로눕혀 배 위 양편에 나무 판자를 지들렀어.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서 네 서방 어디 갔느냐고 고문했지. 이 아인 모릅니다, 놔줍서 해도 놈들은 내 뺨을 때리고 그 짓을 했지.”

“폭도년이니 죽여야 한다”
4·3을 직접 겪은 제주 할머니들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허영선 제공/ 허영선 제공

4·3을 직접 겪은 제주 할머니들이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며 눈물 흘리고 있다. 허영선 제공/ 허영선 제공

1948년 5·10 총선거를 피해 산으로 올랐던 경험이 있는 여인들은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도피자 가족으로 몰렸다. 그들이 당한 고문 역시 혹독했다. 이들은 이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집을 회의 장소로 잠시 빌려줬던 양○○은 누군가의 밀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 일본에서 잠시 고향에 왔다가 일본의 남편한테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던 그는 5살 딸아이의 엄마였다. 그의 전 인생은 그날로 뒤집어졌다. 회의 참석자 이름을 절대 불지 않고 “모르쿠다(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던 그에게 내려친 고문의 모습은 이랬다.

“이년은 폭도년이니 죽여야 한다고. 쉐(소) 닮은 년이니 죽여야 한다고. 돼지 달아매듯이 이레 착 저레 착 막 두드려 반 죽으니까 떨어집디다. 손을 내놓으니 몽둥이로 두드리곡 손가락은 완전 꺾어지니까, 상의는 벗기지 못하니까 아랫도리만 벗겨서 그렇게 두드립디다. 3일 동안 두드려도 바른말 안 하니 이런 지독한 년은 없다고. 천장에 달아매고 두드리다가 코로 주전자에 끓인 물을 들이켜니 죽어질 것 아니우꽈(아닙니까). 밖에 동지섣달 얼려놓은 물에 던져. 살아나니까 끌어다가 다시 코로 물을 붓고. 손목 심고 돌리며 이제도 바른말 못하겠냐고 과락 밀리니 이마 벗겨지고, 이빨 다 무너지고. 아픈 줄도 모르곡. 옷이라도 입혀 그렇게 하지.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 목숨 질긴 사람이우다.”

겨우 정신이 돌아온 그에게 순경이 말했다. “이제도 바른말 못하겠냐고. 그 순경이 자기 말만 들으면 살 수 있다고 헙디다….” 그날 이후 그의 생은 완전히 조각났다. 고문은 질겼고, 기억의 힘은 너무 강해서 지금도 고통은 밤까지 따라붙는다. 깊은 기억은 죽을 때까지 살아남는 힘을 갖는 건가.

만삭의 여인에게 가해진 고문도 있다. 출산이 임박했던 여인 전○○에게 달려온 사람은 산파가 아니었다. 남편이 산파를 데리러 간 사이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수없는 구타가 이어졌다.

“멍석말이가 다 뭐야. 이리 차면 저리 나동그라지고 할 때는 정신 좀 차려진 때야. 하루 만인지 이틀 만인지 살아났지. 온몸은 멍들어 형편없고. 다 죽은 걸로 알았어. 정신 나서 보니 애기도 있었어. 그러곤 정신을 놓아버렸어. 방은 피로 번번했고 순경들이 나갔어. ‘사람 죽었다’ 소리에 사람들이 달려온 거야.” 인근 병원 간호사 출신의 그는 고통 속에서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간호사로 다녔던 병원 의사들도, 동료들도 볼 수 없었다. 60년 넘어서야 병원 엑스레이를 찍었다. 병원에선 머리가 함몰된 지 40년 넘었는데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 했다. 집안 사람들도 그의 한쪽 눈이 멀었다는 것,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것을 알지 못했다. 절대 말하지 않았다. 마을 팽나무에 임신부를 매달아놓고 학살한 일도 있었다.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

남편 잃고 홀로된 여성들이 살아갈 힘은 오로지 자식들이었다. 4·3 시기 어디론가 사라진 남편을 대신해 자식들과 시부모를 모시고 피신을 한 것은 여성들이었다. 그러다 붙잡히면 도피자 가족으로 모진 고문을 겪었다. 행방불명자 가족이 있는 여성들은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산다. 젊은 남편은 죽고 당신은 아흔 넘게 살아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인도 있다.

행방불명된 이십 대 남편이 행여 어디선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며 기다리던 가시리의 박내은. 그는 1983년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벌어지자 제주시 연동에 있는 한 방송사를 찾았다. 혹시 남편이 육지 어딘가에 살아 있어 자신을 찾지 않을까 해서였단다. “이산가족들이 울고불고하는 장면이 텔레비전 나올 때 혹시 (남편이) 육지로 넘어가 살았으면 그래도 편지라도 할 것인가 해서 오래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한 여인은 대구형무소에 수용당했다는 남편을 찾아갔지만,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찾을 길 없는 주검 대신 자신이 갖고 간 옷을 사른 재를 한 줌 손수건에 담고 왔다. 두 남동생이 학살된 데 이어, 예비검속으로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마저 행방불명됐다는 김순아. 그 역시 가족의 주검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친정아버지로 인해 친정가족 모두 4·3으로 몰살됐다. 그래서 4·3 기사는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했다. “예전엔 바다에서 헌 고무신짝만 봐도 어머니 생각, 헌 걸레만 봐도 어머니 생각. 이런 꽝(뼈)만 봐져도 어머니 생각 나는데 찾지도 못하고. 내가 죄인이야.”

육지 출신 경찰의 수양딸로 들어가 평생 자신의 성씨가 바뀌어버린 여인에게도 4·3은 입 밖에조차 내지 못하는 고통이다. 팔순을 앞둔 그는 아예 고향 땅 제주도를 밟지 않는다. 원망은 자신을 그리 놔둔 오빠에게 향한다. 부모님 호적에서 빠진 채 평생을 살아온 여든 살의 강○○.

사라졌던 아버지는 얼마 뒤 광주형무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그는 부모님이 4·3 때 왜 죽었는지, 70년이 된 지금까지 “여자라서 물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붙잡혀간 뒤 중산간 마을 봉개동에 살았다는 그의 집에 군복 입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아들을 내놓으라’며 어머니를 회초리와 몽둥이로 매타작했다. 어머닌 말 못하는 흉내를 내며 맞기만 했다. 이후 열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3살 여동생은 굶어 죽었어. 우리 어머닌 눈물도 하나 안 내고, 묻을 걱정이라. 이 아길 어찌 묻을까. 당(친족)한테 아이를 묻어달라고 사정을 한 모양이라.” 갈 곳 없는 그들은 외양간에서 잠을 잤고, 제사도 쇠막에서 했다. 한 번이라도 밥을 먹고 싶었다. 11살 그에게 수양딸 삼자고 우도에서 한 엄마가 찾아왔다.

평생 뒤틀린 삶 살아낸 여인들

“이 아이를 우릴 줍서. 어머닌 절대 안 된다고 했어. 죽어도 같이 죽자 했어. 막 울었어. ‘어머니, 나라도 살아야 할 거 아니우꽈. 쌀도 하나 없는데.’” 한 입이라도 덜어야 했다. 그렇게 수양딸로 가 6년을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너희 엄마가 크게 울더라. 그렇게 우는 사람 처음 봤다고 해. 그래서 나는 절대 우도에 (수양딸로) 간 말 안 해. 챙피해서. 물질해서 친정집 세 개 사준 적도 있어.” 살아남은 남매의 호적은 부모가 아닌 친척 호적에 남았다. “우린 왜 호적도 못 찾는지, 누군한테 물어야 하는 건가? 우리 아버지는 첫아기를 서른에 났어. 아들도 없는데 (군복 입은 사람들이) 왜 아들을 내놓으라 했는지 물어보고 싶어.” 아직도 자발적으로 남의 집에 갔다는 말을 가슴에 묻고 산다는 그가 그런다. “그렇게 곱닥한(고운) 사촌언니도 임신했는데 죽었어. 막 화나지. 죄 없는 사람들을 왜 죽여. 징글징글하지.”

엉키고 뒤엉키는 4·3의 광풍을 피해 일본으로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좋은 세상이 곧 올 줄 알았다”며 주체적으로 활동했던 여성들도 있다. 오사카에 사는 조은숙은 어려서 본 동네 학살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땐 총 맞아 죽는 사람은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여성은 “학살 모습을 봐선지 꼬챙이에 꿴 고기는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내놓은 는 4·3 희생자의 21.3%가 여성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런 무장도 없는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제주섬 거기 있었다는 이유로 희생당했다. 대통곡을 가슴에 묻고, 애도조차 할 수 없었다.

죄 없이 육지 형무소에 갇힌 한 여인은 갓난아이가 죽자 찬 바람 쌩쌩 부는 전남 목포의 한 파출소 빗자루 위에 주검을 올려놓고 왔다고 눈물을 흘린다. 젖이 퉁퉁 불은 수용소의 또 다른 젊은 엄마는 “빨갱이 새끼에겐 젖도 주지 말라”는 저주의 목소릴 들었다. 밤엔 산이 무섭고, 낮에는 아래가 무섭다고 울부짖던 젊은 여성들은 4·3의 비극이 “시국 탓”이라 말한다. 국가의 폭력에 희생됐으나 이들은 누구를 원망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이들의 감춰진 목소리는 여전히 4·3 역사에서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꽃 같은 청춘의 생 위에 쏟아진 광풍에 휩쓸려 평생 뒤틀린 삶을 살아야 했던 여인들, 4·3의 가장 가혹한 시간이었던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1949년 2월까지 키보다 높은 눈을 짐승처럼 헤치며 헤매야 했던 여인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죽어가던 모습을 눈물 없이 지나쳐야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들의 삶이 증거다

기억과의 싸움은 올해로 70년을 맞는다. 그 시기를 살았던 여성들의 사연은 국가 공권력이 무고한 여성들의 인권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했는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을 보여주는 극명한 증거이자 진실이다. 살아남은 그들이 찬란하나, 가혹한 제주의 4월을 통과하고 있다.

허영선 시인·제주4·3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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