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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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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고문 이겨낸 조선의 혁명 여걸

한평생 독립에 헌신한 3·1운동의 투사 김마리아

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해방 1년 앞두고 목숨 거둬
등록 2018-01-16 15:44 수정 2020-05-02 19:28
애국부인회 임원. 번호순으로 김영순 서기, 황에스더 총무, 이혜경 부회장, 신의경 서기, 장선희 재무부장, 이정숙 적십자부장, 백신영 결사대장, 김마리아 회장, 유인경 대구지부장. 독립기념관 제공

애국부인회 임원. 번호순으로 김영순 서기, 황에스더 총무, 이혜경 부회장, 신의경 서기, 장선희 재무부장, 이정숙 적십자부장, 백신영 결사대장, 김마리아 회장, 유인경 대구지부장. 독립기념관 제공

김철수 노인의 지갑에 한 여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는 지갑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지인들은 궁금해했다. 부인도 아닌데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지금도 품고 다니나. 혹시 젊어서 맺었던 연인이 아닌가.’

노인은 혁명가였다. 일제의 감옥에서 십수 년을 보낸 투사고, 비밀결사인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탄압으로 와해된 조직을 일으켜세운 지하운동가였고, 러시아 모스크바와 중국 상하이를 넘나들며 코민테른 외교를 좌우하던 풍운아였다. 남북이 분단될 즈음 운동 일선에서 은퇴해, 고향인 전북 부안의 야산에 토담집을 짓고 지냈다. 이따금 화가 허백련 등과 어울려 글씨를 쓰며 지내는 게 낙이라면 낙이었다.

김철수가 가슴에 품은 사진

노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몇몇 지인에게 사진에 대해 얘기했다. 사진 속 여인은 3·1운동 때 비밀결사 애국부인회 회장이던 김마리아였다. 김철수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상하이에서였다. 1923년 1∼6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 회의장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 독립운동의 진로를 좌우하는 막중한 의의를 지닌 이 회의에는 중국, 러시아, 미국에 있는 반일 단체의 대표원이 125명이나 모였다. 김철수는 고려공산당 상하이파 대표원 자격으로,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대표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김철수는 31살이었고, 김마리아는 그보다 한 살 많았다.

김마리아의 존재는 이채로웠다. 대표원 총수 중에서 3.2%에 지나지 않는 여성이기도 했지만, 그의 특이한 행동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했다. 30분을 못 넘겼다. 의자에 앉아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가만히 견디지를 못했다. 빈자리를 찾아 옮겨 앉아야 했다. 때로는 자리에 앉았다가 서 있기를 반복했다.①

그러나 회의장의 누구도 그의 산만한 행동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렇게 됐는지 다들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질책은커녕 연민의 시선으로 그를 대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생이었다. 서울에서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24살 되던 191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도쿄조시가쿠인(東京女子學院) 학교를 다녔다. 본과(중등교육과정)에서 1년, 고등과(전문학교 과정)에서 3년간 수학했다. 김마리아는 유학생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쿄에 건너간 이듬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이 되었다. 그때 도쿄의 여자 유학생 수는 40여 명이었다. 조선인 유학생 350명의 약 10%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상층의 여성 지식인 사회였기에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컸다. 김마리아 회장은 기관지 발간에 힘썼다. 이 잡지는 남녀 학생을 망라한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과 나란히 유학생 사회의 여론을 이끌었다.

김마리아는 3·1운동의 투사였다. 1919년 2·8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그 선언문을 몰래 국내로 들여왔다. 3·1운동의 소용돌이에서 여학생 조직화에 노력했다. 도쿄여자유학생 그룹과 이화학당 그룹을 묶고, 서울 시내 각 여학교 대표자들의 연합 기구를 조직하려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비밀이 탄로나 체포됐다. 3월6일 체포된 그는 3·1운동 여성 수감자들이 일반적으로 겪은 폭력과 수모를 견뎌야 했다.

체포된 여성들이 받았던 학대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다. 무차별 구타가 기본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포악한 태도로 나를 의자로부터 넘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다시 달려든 그들은 얼굴과 손다리는 물론이고 몸까지 사정없이 구타하였다.” 성적 폭력도 일어났다. “그들은 나의 옷을 모두 벗기고 억센 밧줄로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았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에게 무수하게 내리쳐지는 참대 막대기의 뭇매에 나는 의식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낌 없는 모욕도 가해졌다. “우리는 그 추운 밤에 발가벗기어 일본인 남자의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어떤 형사부의 순사가 나더러 ‘고양이 모양으로 네발로 기어서 저 거울 앞을 지나가거라, 허 네 모양이 예쁘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일제 모진 고문에 고질병 얻어

김마리아는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얼마나 폭행을 당했던지 신경이 아주 말할 수 없이 쇠약해졌다. 귀와 코에 고름이 들어차는 후유증도 앓았다.② 유양돌기염과 상악골 축농증이라는 고질병에 걸린 것이다. 이 질병은 마리아의 이후 삶을 줄곧 괴롭혔다.

그는 수감 4개월 뒤인 7월24일, 체포된 여성 46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김마리아는 출옥하자마자 활동을 재개했다. 그즈음 3·1운동의 혁명적 열기가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 6월28일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에 대한 아무런 희망적 조치 없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세시위와 유인물 살포, 운동자금 모금과 수감자 지원에 종사하던 비밀단체들이 기력을 잃어갔다. 여성단체도 그랬다. 만세시위운동이 고조됐을 때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오현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애국부인회가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다.

김마리아는 그 단체의 재조직에 나섰다. 10월19일 여성 16명이 은밀히 모였다. 정신여학교 부교장이자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의 사택 2층에서였다. 김마리아는 선교사의 호의로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날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애국부인회가 새로이 출범했다. 그를 필두로 하는 정신여학교 졸업생 그룹이 주가 되고, 황에스더 등 몇몇 이화학당 졸업생들이 가세했다. 전자는 기독교 장로교 계열이고, 후자는 감리교 계열이다.

애국부인회는 규모가 큰 비밀결사였다. 각 도에 하나씩 지부를 설립하기로 했고, 적십자부와 결사대 같은 특별 부서를 설치했다. 특별 부서를 둔 까닭은 만세시위운동이 종식된 뒤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려는 독립운동의 일반적인 흐름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김마리아의 안목이 정세 변화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직을 새로 추스른 지 불과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28일 일제 검거가 시작됐다. 경북 경찰부가 주무기관이었다. 며칠 만에 서울과 원산, 북간도, 제주 등지에서 52명의 관련자가 체포됐다. 모두 여성이었다. 다들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전격적인 체포가 이뤄진 까닭이 있었다. 밀고가 있었다. 내부 구성원 가운데 배신자가 있었다. 애국부인회 취지서와 규칙 등 비밀서류가 발각됐다. 지하실 땅속에 묻어둔 등사판과 회원 명부도 드러났다. 공문서 작성에 사용한 여러 도장도 빼앗겼다.

체포된 사람들은 폭력에 노출됐다. 특히 회장 김마리아는 저들의 표적이 됐다. 심문관들은 그의 두 무릎 사이에 굵은 장작개비를 넣고, 수갑을 채운 두 팔 사이에 쪼갠 대나무를 끼운 채 빨래 짜듯이 비틀었다. 코에 고무호스를 끼워 물을 집어넣었고, 굵은 나무토막을 끼고 앉은 가녀린 여성을 짓밟았다.③

병보석 상태서 홀연 망명길 올라
김마리아의 탈출을 전하는 <동아일보> 1921년 8월5일치 3면. <동아일보> 자료

김마리아의 탈출을 전하는 <동아일보> 1921년 8월5일치 3면. <동아일보> 자료

김마리아는 차마 입으로 옮기기 어려운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심문관들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발가벗긴 채 손과 발을 묶었다. 곁엔 타오르는 화로가 있었고, 인두와 쇠꼬챙이가 그 속에서 벌겋게 타올랐다. 짐승 같은 자들은 끝내 그 도구를 사용하고 말았다. 화롯불에 달궈진 쇠꼬챙이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았다. “그렇게 하고서 문지르면 그곳이 벗겨질 것 아니여?” 진실을 전하는 김철수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마리아는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주 그냥 머리를 때리고 터지고 소리를 지르고 그냥 욕을 하구” 그러다가 결국 혼절했다.④

김마리아는 육신과 정신이 파괴됐다. 정신이 혼미해 말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곡기라고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뼈만 남은 몸에 얼굴은 퉁퉁 부었다. 면회소에 나올 때는 제 발로 걷지를 못해 간수가 부축했다. 마치 송장을 떠메어 나오는 듯했다. 면회객은 그 모습을 보고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더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아무래도 마리아가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고, 면회 소감을 얘기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력이 주효했을까. 1920년 5월22일 대구지방법원은 김마리아의 병보석을 허가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주거지를 대구 거주 블레어 선교사의 사택과 주변 건물로 제한하고, 의료진 외에 어떤 조선인도 면회해서는 안 되었다. 치료가 급했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병증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 가장 위급한 것은 귀와 코에 들어찬 화농이었다. 1921년 6월20일 고등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김마리아는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두 번, 한양병원에서 한 번 수술했다. 고열과 신경쇠약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콧속과 양미간, 귓속에 가득 찬 고름을 긁어내는 수술이었다. 완치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고름이 다시 고였다.

최종심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된 지 9일째 되던 날이었다. 김마리아는 병보석 때 지켜야 할 규범을 깨뜨렸다. 1921년 6월29일, 정양을 위해 머물던 서울 성북동의 한적한 농가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잠자던 이부자리만 남겨둔 채였다. 탈출이었다. 김마리아는 망명길에 올랐다.

병고에 신음하는 젊은 여성이, 경찰과 사법 당국의 감시를 받는 상태에서 어떻게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을까? 협력자들이 있었다. 선교사 매큔은 김마리아의 망명 계획을 지지하고 재정을 지원했다. 망명과 정착 비용으로 4천원을 제공했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원 정도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4억원쯤 하는 큰돈이었다.

교통편을 주선하고 길을 안내해준 이도 있었다. 임시정부 교통부 소속 요원으로 상하이와 국내를 넘나들며 비밀 임무를 하던 윤응념(28)이었다. 그는 김마리아뿐만 아니라 상하이 망명객 가족들의 밀항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상하이 거류민단장 도인권의 부인과 두 아들, 흥사단 원동위원부 김붕준의 아내와 세 자녀(아들 1명, 딸 2명)도 밀항선을 탔다. 일행이 산둥반도 웨이하이 항구에 도착한 때는 7월21일이었다. 서해 넓은 바다에서 풍랑과 뱃멀미에 시달린 지 17일 만이었다.⑤

김마리아의 탈출 소식은 널리 알려졌다. 서울 안 신문 지면을 두루 장식했다. 국내의 친지와 동료들은 그의 망명을 기뻐했다. 건강과 앞날의 행운을 빌었다. 상하이의 망명자 사회에서도 김마리아의 도래를 환영했다. 상하이 거류민들은 김마리아의 건강이 회복되기 기다려 1921년 11월25일 환영회를 열었다. 그는 3·1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간주됐다.

잇따른 혼담, 찾지 못한 반려자
(왼쪽부터)1927년 파크대학 졸업 때 김마리아./ 김마리아의 1932년 미국 재입국증 사진./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30살의 김철수./ 노년의 김철수.  박용옥 제공/ 박용옥 제공/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왼쪽부터)1927년 파크대학 졸업 때 김마리아./ 김마리아의 1932년 미국 재입국증 사진./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30살의 김철수./ 노년의 김철수. 박용옥 제공/ 박용옥 제공/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상하이 조선 사람들은 김마리아를 찬탄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따스하게 대했다. 특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그가 홀로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혼담이 오갔다. 혼인 상대로 거론되는 이는 일본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장진영이었다. 나이 지긋한 미혼남이었다.

중매에 나선 사람은 흥사단 지도자 안창호와 고려공산당 대표원 김철수였다. 안창호는 김마리아의 뜻을 확인하고, 김철수는 시베리아에서 함께 지낸 적 있는 장진영의 의사를 확인했다. 남자는 쾌히 승낙했다. 김마리아가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그랬다고 한다. 장진영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집가면 병이 나을 것 같아” 승낙했던 것이라고 김철수는 해석했다. 하지만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김마리아가 싫다고 거절했다. 안창호는 거듭 권했다. 제발 시집가라고,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김마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첫 번째 중매는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혼담 상대는 김철수였다. 김마리아와 숙소를 같이 쓰던 양한라가 나섰다. 제주도 출신의 흥사단 단원이었다. 그의 연인이자 2·8독립선언운동에 참가했던 재일 유학생 정광호(29)도 거들었다. 양한라와 정광호가 중매를 섰다. 두 사람은 김마리아의 의중을 먼저 확인했다. 김마리아는 수줍게 승낙했다고 한다.

김철수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렸다. 그는 오래 생각한 끝에 결심했다. “그 사람은 애국부인회 회장이다. 그런데 나한테 시집오면 첩이 된다. 아! 나에겐 아내가 있다. 내가 승낙하면 두 여성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 그래서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양한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김마리아의 뜻을 다시 전했다. 혁명운동을 하는 동안 같이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만일 남자가 운동을 포기하고 조선 내지에 가서 편히 살려고 한다면 그때 갈라서도 좋은 일이다. 만일 독립이 된다면 그때는 내지에 있는 첫부인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의사였다.

양한라에게서 김마리아의 의지를 전해들은 김철수는 고민했다. 착잡했다. 자기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 둘이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어딘가 가서 ‘교원질’이나 하며 먹고살게 되지 않을까. “아! 안 될 말이다.” 이미 결혼한 여성도 떼내버리고 국외 망명과 지하운동으로 돌아다니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김철수는 다시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김마리아도 첩 신분이 되니, 그를 모욕하는 일이다. 김마리아는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호칭을 받는 사람이 아닌가.⑥ 그럴 수는 없다고 확고히 결정했다.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 회기 중에 한때 앓았다. 김철수와 정광호는 문병을 갔다. 혼사 거절 뜻을 명백히 전한 뒤에 있었던 일이다. 머리를 풀고 드러누웠는데 김마리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병상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대단히 불쌍했다. 80대 노인이 된 뒤에도 김철수는 그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 머리 푼 것이 지금도 눈에가 환해. 불쌍해.”⑦

“아이고! 1년만 더 살았더라면…”

김철수는 뒷날 김마리아의 소식을 들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9년간 파크대학, 시카고대학원, 컬럼비아대학 교육대학원, 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32년 귀국했고, 종교활동에만 종사한다는 입국 조건에 묶여서, 원산의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 장로교여전회 회장 등의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다 해방 1년 전에 원산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아이고! 1년만 더 살았으면 해방되는 것을 보았을 텐데.” 김철수는 책에 실린 김마리아의 사진을 사진사에게 옮겨 찍게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평생 품에 지녔다. 영혼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늘 잊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한다.

참고 문헌
① ‘구술자료 김소중 소장본’, 한국정신문화연구
원 현대사연구소 편, 105쪽, 1999
②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5), 1920년 6월6일치
③ 金永三, , 태극출판사, 중판, 236쪽, 1978
④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앞의 책, 104쪽
⑤ 박용옥, , 홍성
사, 274∼286쪽, 2003
⑥ ‘김마리아양의 근황’, , 1932년 11월3일
⑦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앞의 책, 108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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