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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등록 2018-01-09 16:37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재미있는 일이 많아서건 해야 할 일이 많아서건 교재 외엔 책을 어지간히 읽지 않는 1학년 학생들을 위해 권장도서 목록을 주고 학기 말까지 그중 한 권의 독후감을 내도록 하는 반강제 독서 캠페인을 벌였다. 목록에는 요즘 가장 뜨거운 베스트셀러 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학생 전원이 약속이나 한 듯 그 책의 독후감을 썼다. 도서 목록에서 유일한 소설이니 읽기 수월해 그런 선택을 했겠구나 하는 씁쓸함이 앞섰지만, 그렇게라도 젊은 친구들이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젠더 감수성</font></font>

이제 열아홉, 스무 살인 대학생들이 쓴 의 독후감을 읽어보니 글 솜씨나 생각의 깊이만큼 소설에 대한 반응에도 적잖은 차이가 있었다. 여학생이 대부분인 대상군의 속성상 같은 여성으로서 ‘82년생 김지영’이 겪은 여러 차별에 공감하며 이런 성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소수인 남학생들도 책을 읽고 한국 사회의 성차별에 많이 각성했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성차별이 많이 사라진 현실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내용에는 크게 공감되지 않는다는 여학생이 꽤 있었고, 진전된 성평등 상황과 남성에 대한 역차별을 무시한 일방적 내용이 담겼다고 생각한 남학생도 있었다.

무엇보다 여대생들의 젠더 감수성이 생각보다 낮다는 사실이 좀 충격이었다. 많아야 두 명의 형제자매이거나 외둥이로 자란 또래 여성들이 학교나 가정에서 눈에 띄는 성차별을 받아본 일이 없었을 터라 이해는 된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어머니를 시작으로 주변에 성차별로 고통받는 여성이 부지기수일 텐데 젠더 감수성이 그 정도인가 싶었다. 일단 사회적으로 초·중등 교육에서 성평등·인지 교육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점, 그동안의 젠더 정책이 성평등이 아니라 여성 우대 정책으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젠더 상황을 호도해왔다는 점 등에 의해 그런 현상이 생겼을 것이다.

독후감들을 읽고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일상적 이해관계나 욕구와 무관한 문제에 무관심을 넘어 지나치게 무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문제엔 목소리를 드높이지만 타자의 문제에는 무지나 무관심을 넘어 걸핏하면 적대적이 된다. 그래서 수백만의 촛불이 모여 거악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이 공동의 대안을 만드는 일로는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중심의 원근법 구도에 갇혀 소실점 너머 세계에는 눈길을 둘 생각조차 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를테면 목하 뜨거운 페미니즘이 공동의 대안적 행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자칫 폐회로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지성적인 세상을 바라며</font></font>

모든 생각은 자기 문제에서 출발할 때만 구체성과 절실성을 가진다. 하지만 자기 문제에만 함몰된 생각은 보편성과 상호주체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전체의 맥락 속에 자기 문제를 놓는 것은 어렵고, 어떤 면에선 매우 거추장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에 무관심한 사회는 곧 만인이 만인에게 서로 늑대인 사회, 즉 야만사회에 불과하다.

야만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중심의 좁은 원근법을 넘어서는 것, 역지사지를 하는 것, 무엇보다 타자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잊었고, 잃은 지 오래인 ‘지성’이란 것의 알맹이다. 새해는 좀더 지성적인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계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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