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외벽에는 19층 건물 절반을 가리는 거대한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보고 또 보았다. ‘하나된 열정 하나된 대한민국’.
이 슬로건은 너무 진부해서 공명과 공감을 얻기 힘들지만,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슬로건에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국가가 스포츠를 일종의 수동 혁명의 기제로 활용’하려는 위험성이 가려지기도 한다.
국가주의 슬로건에 대한 우려오랜 독재 체제를 종식하고 드디어 입헌군주제하의 민주주의를 가동한 스페인이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내걸었던 슬로건, ‘스페인은 다르다’(Spain is different) 같은 적극적 가치 부여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겨울올림픽 개최에 세 번 도전하면서 내걸었던 ‘예스 평창’을 임팩트 있게 활용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된 열정 하나된 대한민국’은 구태의연하다. 문재인 정부가, 일종의 문화적 파시즘이라 할 수 있는 이 흐름과 일정하게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기 오래전부터 평창올림픽이 스포츠 국가주의로 준비돼왔다는 점에서 ‘동원 기제로서 스포츠 스펙터클’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과거 1988 서울올림픽이 그랬고 2014 인천아시안게임이 그랬듯, 평창의 개막식도 스포츠 스펙터클의 ‘정치적 심미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자국 문화의 특수한 요소나 형태를 극단적으로 찬미해 ‘순수’라는 심미적 표현으로 일종의 문화정치를 구사하는 방식 말이다.
개막식을 책임지는 송승환 총감독은 개막 50일을 앞둔 인터뷰에서 “중국이 자연으로 압도하고 일본은 아기자기한 인공적 꾸밈이 강하다면 한국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한다”는 전제 아래 “현대적 미디어아트와 세계적인 한국의 영상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한국을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린다’고 하는 신념이 당대의 보편적 가치에 호소하기보다 형태적 문화 요소의 스펙터클화가 되기 쉬운 것이다.
개막식의 특성상 공연 1초 전까지 무엇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알 수 없으니 속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로 입지전을 쓴 송승환 총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 ‘한국적 미’의 함의를 짐작하건대, 개막식은 형태적 민족주의나 문화적 소재주의를 크게 넘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이 관점에 서면, 개막식은 민족적 시원이나 문화적 원형을 확대재생산하는 식으로 펼쳐지기 쉽고, 지금의 격렬한 삶들은 배경막 정도로 축소된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송승환 총감독이 “우리나라에서 치른 국제행사들을 보면 사실 레퍼토리가 뻔했다. 부채춤, 태권도, 사물놀이 등 같은 패턴이었다. 거기서 좀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개회식의 슬로건 ‘피스 인 모션’(Peace in Motion·행동하는 평화)은 각별하다. 역대 어느 올림픽에서도 ‘평화’는 빠지지 않는 주제이거니와 특히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고정값에 더해 매일같이 일어나는 ‘북핵 위기’ 상황에서 펼쳐지는 올림픽인 만큼 ‘평화’라는 주제는 평창과 뗄 수 없는 가치가 된다. 어떤 형태로든 이 주제가 개막식의 화려함 속에서 ‘빛이 바래지 않는’ 방식으로 구현되기를 희망한다. 자칫 ‘평화’가 특정한 형태의 화려한 남발이라는 소재주의로 그칠 수 있다. 정체불명의 퓨전 한복을 입고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식의 몰역사적 연출이 벌어진다면, 위험하다.
그 때문에 더욱 당대적 삶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민족 신화적 내러티브가 아니라 전쟁과 분단, 독재와 민주화, 살인적 경쟁 등 당대 삶의 조건에서 어떻게 우리가 실질적인 사회적 평화를 위해 노력했는지에 대한 관점이 반드시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시각적 소재로 개막식 현장에 펼쳐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식은 곤란하다.
평화는 필사적 노력의 과정개막식과 별개로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평화’는 스펙터클한 형식을 넘어, 행사의 준비 과정가 평화적이어야 한다. 수많은 소수 부족 아이들이 전통 복장을 한 채 오성홍기에 차렷 경례를 하도록 한 2008 베이징올림픽의 중화주의나 동성애 선수들의 차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2014 소치올림픽의 러시아 민족주의에서 볼 수 있듯, 개막식 때 비둘기를 날린다고 평화가 구현되는 게 아니다. 올림픽의 준비 과정과 진행 상황에서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을 때 비로소 ‘피스 인 모션’의 작은 씨앗이라도 보게 된다.
평창겨울올림픽을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3개 회원국 중 157개국의 만장일치로 휴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직후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정부는 선수단의 안전 보장을 내세워 평창올림픽에 대한 ‘북한 공포’를 부풀리고, 일본 아베 정부도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내걸어 평창에 대한 발걸음에 스스로 제동을 걸고 있다. 북한도 아직까지는 올림픽 참가 여부를 시원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다.
우리 정부가 평화를 내세워 복잡한 정세를 뚫고 가려면 과정 자체의 평화가 필요하다. 최소한 ‘평화’라는 슬로건이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작동돼서는 곤란하다. 여러 이유로 북한이 올림픽을 보이콧하거나 선수단을 대폭 축소했을 때, 이를 평화에 반하는 행동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12월19일 미국 《NBC》와 한 인터뷰에서 올림픽 기간에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연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선제적으로 밝힌 것은 의미가 있다.
스포츠 스펙터클의 과도한 민족주의와 평창올림픽을 둘러싼 4대 강국의 줄다리기만큼은 아니지만, 지극히 스포츠의 내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스포츠계가 과연 평화라는 주제를 제시할 만한 입장인가 하는 점이다.
요한 갈퉁의 말처럼, 평화는 어떤 식으로든 도달해야 할 목표이거나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평화적 상태의 유지 또는 회복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말한다. 하지만 한국의 스포츠는 개별 선수들을 극한으로 몰아세우는 냉혹한 경쟁의 세계였다. 폭력이나 금품 수수 같은 가시적 폭력에 더해 엄격한 위계질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내동댕이쳐지는 비가시적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였다.
지금 당장 올림픽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스포츠계 내부의 ‘평화’나 ‘인권’이 의제가 되긴 힘들 것이다. 평창 이후, 과연 우리 스포츠계가 국가주의와 남성주의와 성적 제일주의를 극복하고 ‘더 나은, 더 많은, 더 넓은’ 평화적이고 인권적인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러지 못하고 전혀 그럴 의도조차 없이 올림픽 이후에도 스포츠계의 오랜 적폐가 청산되지 않는다면, 어떤 내용의 개막식도 심지어 북한의 전향적인 올림픽 참가조차 하나의 구경거리이자 동북아의 정치적 이벤트에 그칠 뿐이다.
정치적 이벤트 넘어서야스포츠계 내부의 평화와 인권을 향한 노력이 풍성해지고, 그 기반 위에서 스포츠에 ‘의한’ 평화적 풍경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며 그 결실로 이른바 ‘국가지대사’가 펼쳐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평화’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정윤수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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