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에만 대표 선수가 있는 건 아니다. 여행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있다. 대표 선수가 대표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여행이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더 즐거운 법. 재미난 이야기와 함께 강원도 평창 여행의 대표 선수들을 둘러보자.
오대산 월정사우선 간단한 퀴즈부터. 오대산(五臺山)은 왜 오대산일까? 을 보면 “동쪽이 만월봉, 남쪽이 기린봉, 서쪽이 장령봉, 북쪽이 상왕봉, 가운데가 지로봉인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하였다”고 적혀 있다. ‘다섯 봉우리가 있어서 오대산이라, 이것 참 간단하군!’하고 넘어가면 재미없으니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보다 이른 시기에 나온 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590∼658)가 중국 오대산에서 일주일간 기도했더니 문수보살이 나타나 석가세존의 사리를 건넸단다. 귀국해서 중국 오대산과 비슷한 산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강원도에서 다섯 봉우리가 연꽃처럼 벌어진 산을 발견한 뒤 오대산이라 이름 지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월정사는 이 설화의 주인공인 자장율사가 오대산에 지은 절이다.
월정사 주차장에 차를 대고 금강교를 건너 천왕문, 요사채, 동별당을 지나면 교과서에도 나오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이 보인다.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 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라고 안내판 문구에 적혀 있다. 이를 보고 고개를 돌리면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우람한 법당이 눈에 들어온다. 탑을 마주 보고 있으니 ‘여기가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인가’ 생각하게 되는데, 현판에는 ‘적광전’(寂光殿)이라 쓰여 있다.
적광전은 ‘진리의 화신’이라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이다. 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니 닫집(불좌 위에 만든 작은 집 모형)에 좌정하신 부처님의 모습이 석굴암 대웅전 석가모니불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수인(손의 모양) 또한 비로자나불의 상징인 지권인(왼손 검지를 오른손 주먹으로 감싸는 모양인데, 중생과 부처는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석가모니가 깨닫는 순간 지었다는 항마촉지인(한 손은 땅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은 무릎에 얹은 모양인데, 악마를 항복하게 만든다는 뜻)을 하고 있다. 적광전과 석가모니불,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어떻게 된 일일까?
사연은 간단하다. 원래 이곳은 대웅전이었다. 그러다 1950년대 중반 이곳에 수도원을 세운 탄허(1913~83) 스님이 결사의 주경전이던 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현판을 ‘적광전’으로 고쳤다. 지금도 걸린 현판과 주련(기둥과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은 탄허 스님의 친필이란다. 신라 고승의 이야기가 천년을 훌쩍 넘어 대한민국의 고승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팔각구층석탑과 적광전을 품은 월정사는 일주문에서 본채까지 약 1km에 걸친 아름드리 전나무 숲길로도 유명하다. 이 숲길의 별명은 ‘천년의 숲길’이다. 멋진 이름이지만 숲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도 수백 년을 넘지 않는다는 건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비밀’이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숲길을 걷는 감흥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대산과 월정사에 담긴 재미난 이야기와 함께라면 더욱 그렇다.
연계 여행지와 맛집
월정사에는 유명한 길이 또 하나 있다. 오대산을 대표하는 또 다른 사찰인 상원사로 이어지는 약 9km의 아름다운 숲길이다. 이 길은 에서 진리를 찾아 여행하는 선재 동자의 이름을 따 ‘선재길’이라 한다. 상원사에서 40분쯤 산을 오르면 자장율사가 가져온 불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나온다.
월정사에서 20km쯤 떨어진 알펜시아 스키점프센터는 겨울올림픽과 함께 새롭게 떠오른 평창의 대표 여행지다. 평창겨울올림픽의 스키점프 경기도 이곳에서 열릴 예정인데, 경기가 없는 날에는 일반인들도 스키점프대를 둘러볼 수 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 스키점프대 꼭대기의 전망만 보는 것이 ‘일반 관람’, 안내를 받아 스키점프대까지 둘러보는 것은 ‘스페셜 관람’이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실감 백배 관람을 원한다면 당연히, 스페셜 관람이 좋다.
월정사 입구에는 고만고만한 산채 전문 식당들이 몰려 있는 식당가가 나오는데, 그중 오대산 민속식당(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52, 033-333-4497)은 반찬이 모두 깔끔하고 곤드레밥과 황태구이 맛이 좋다. ‘맛집 찾아 삼만리’도 불사하는 분이라면 한국전통음식문화체험관 정강원(평창군 용평면 금당계곡로 2010-13, 033-333-1011)을 추천한다. 운치 있는 한옥에서 수백 개의 항아리가 가득한 장독대를 보며 ‘강원나물밥’을 즐길 수 있다. 단, 하루 전 예약은 필수다.
주소: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374-8, 033-339-6800, http://www.woljeongsa.org
실제 가보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가본 듯한 여행지가 있다. 강릉을 대표하는 오죽헌이 그렇다.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이 ‘장원급제 9번 신화’의 주인공 율곡 이이를 낳은 곳.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은 장소는 오죽헌 안 몽룡실이라고 전해지는데, 조선 초기 건축물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오죽헌은 율곡의 초상과 함께 현재 5천원권의 앞면에 실려 있다.
오죽헌에서 봐야 할 것은 지폐에 등장하는 건물만이 아니다. 기억할 것은 오죽헌이 신사임당의 외가 쪽 고택이라는 사실. 신사임당(1504~1551)이 살던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혼인한 뒤 처갓집에 살다가 그쪽 재산을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사임당이 율곡을 시집이 아닌 친정에서 낳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신사임당은 당대에 현모양처가 아니라 천재 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율곡은 직접 쓴 어머니 행장에 “자당은 평소 묵적이 뛰어났는데 7살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했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흉내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그림을 모사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고 적었다. 5만원 지폐에 신사임당 초상화와 함께 그의 작품인 가 들어간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니 고즈넉한 오죽헌을 둘러보면서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인 율곡뿐 아니라 천재 화가 신사임당의 흔적도 더듬어보시길.
오죽헌에서 빼먹지 말아야 할 곳이 또 있다. 정조의 친필을 보관한 어제각이다. 평소 율곡을 흠모하던 정조는 자신의 문집 에 “근자에 들으니 강릉에 (율곡이 지은) 초본과 쓰던 벼루가 있다고 하므로 속히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았더니, 점획이 새로 쓴 듯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 총명하고 뛰어난 자질과 비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깨끗한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정조는 초본에 자신이 쓴 머리글, 벼루 뒤에는 율곡을 찬양한 글을 적어 보냈고, 오죽헌 옆에 어제각을 지어 이를 보관하도록 했다. 지금도 정조의 글씨를 담은 벼루와 은 여전하지만 어제각의 위치는 바뀌었다. 원래 어제각이 있던 자리에는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지은 사당인 문성사가 들어섰고, 어제각은 오죽헌 뒤편으로 옮겼다. 아담한 어제각보다 몇 배는 큰 문성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한다.
연계 여행지와 맛집
옛집을 제대로 보고 싶다면 오죽헌에서 1km 남짓 떨어진 선교장이 좋다. 옛 건물이 몇 남지 않은 오죽헌에 비해 선교장은 안채와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사당에서 행랑채까지 100여 칸에 이르는 건물들이 대부분 예전 모습대로 남아 있다. 오죽헌이 조선 전기 건축물을 대표한다면, 선교장은 조선 후기 사대부의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올림픽의 감동을 미리 체험하고 싶다면 2018평창동계올림픽홍보체험관을 추천한다. 봅슬레이·스노보드·스키점프 등을 4차원(4D) 영상으로 보고, 스톤을 던져 컬링 경기를 체험할 수 있다. 스키점프를 체험하는 가상현실(VR) 코너도 마련돼 있다.
허난설헌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초당동은 ‘초당 두부’로 유명하다. 예능프로 (tvN)에 나온 초당할머니순두부(강릉시 초당순두부길 77, 033-652-2058)는 이전부터 날마다 새벽에 직접 만드는 두부로 유명했다. 강릉을 ‘커피의 도시’로 만든 테라로사 커피공장(강릉시 구정면 현천길 7, 033-648-2760)도 성업 중이다.
주소: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033-660-3308, http://www.ojukheon.or.kr
숨은 이야기는 오래된 사찰이나 고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몇 해 전부터 ‘정선아리랑시장’이란 새 이름으로 불리는 정선오일장도 이야기가 풍성하다. 오래전에 세상을 뜬 승려와 학자, 화가들이 남긴 이야기와 달리 지금도 서민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주된 관심사는 먹고사는 문제. 쌀 한 톨 자라기 힘든 강원도 정선오일장에선 부족한 먹거리에 재미난 이야기를 푸짐하게 얹어 먹는다. 콧등치기국수와 올챙이국수, 메밀총떡 등이 대표 선수들이다.
정선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인 콧등치기국수는 장국에 훌훌 말아 먹는 메밀칼국수다. 척박한 강원도 땅에서도 잘 자라는 메밀을 손으로 밀어 만든 두툼한 면발을 훅, 빨아들이면 억센 국수 가락이 콧등을 친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예전 이곳을 지나던 뗏목꾼들이 간단히 배를 불리고, 다시 떼돈을 벌러 가던 시절부터 부른 이름이라 한다. 이걸 맛본 한 시인이 콧등치기국수를 소재로 시를 짓고, 잡지와 TV에 소개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덕분에 정선오일장에는 콧등치기국수 전문점(?)이 줄지어 있다.
정선뿐 아니라 강원도 다른 지역에서도 많이 먹는 올챙이국수와 메밀총떡은 모양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올챙이국수에 올챙이가 없고 메밀총떡엔 총이 안 들었다. 올챙이국수는 옥수수로 만든 국수다. 메밀처럼 산비탈에서도 잘 자라는 옥수수를 묵처럼 만든 뒤 구멍 난 바가지를 통과시키면 통통한 올챙이를 닮은 짧고 굵은 면이 생겨난다. 간장으로 간한 뒤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씹을 새도 없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순간 허탈해지는 심심한 맛. 하지만 한두 번 먹어보면 담백한 맛이 자꾸 생각나 집에서도 해먹는 사람이 많다. 김치와 돼지고기 다진 소를 넣고 만든 메밀총떡은 이제는 강원도뿐 아니라 전국 어디에서나 맛볼 수 있다.
연계 여행지와 맛집
정선오일장에서 1.5km쯤 떨어진 아라리촌은 강원도 산촌의 생활을 재현한 민속 체험 마을이다. 굴피집, 귀틀집, 너와집, 겨릅집 등 강원도 전통 가옥에 그 안에서 살던 사람들의 일상까지 살펴볼 수 있다. 입장권 대신 사야 하는 3천원짜리 ‘정선군 아리랑상품권’은 정선아리랑시장에서 쓸 수 있다.
아라리촌에서 차로 10분쯤 가면 나오는 아리힐스리조트의 병방치 전망대에서는 하늘을 걷는 스카이워크와 쇠줄에 몸을 매달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짚와이어를 즐길 수 있다. 해발 583m의 절벽 끝에 11m의 U자형 구조물이 돌출된 스카이워크를 따라 걸으면 한반도 모양의 밤섬 둘레를 동강 물줄기가 휘감고 흐르는 비경이 한눈에 보인다. 바닥이 투명한 강화유리로 돼 있어 그야말로 하늘을 걷는 기분이다.
정선을 대표하는 향토음식들은 정선오일장에서 대부분 맛볼 수 있다. 어디를 가도 나름 최고의 맛과 정성으로 모시니 취향 따라 선택하면 될 듯. 기차 아우라지역 앞의 청원식당(정선군 여량면 여량6길 7-1, 033-562-4262)은 30년 전 처음으로 ‘콧등치기국수’라는 이름을 걸고 영업을 시작한 곳으로 유명하다.
주소: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7길 39, 033-563-6200, https://blog.naver.com/jungsun_mk
사진 구완회, 민혜경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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