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5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도 15만 명을 웃돈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은 어눌해도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 스포츠계에서도 귀화 선수가 크게 늘었다. 이들은 ‘제2의 조국’에서 새로운 꿈을 이루기 위해 가슴에 태극마크를 새겼다. 물론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스포츠계에서 귀화 선수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다. ‘돈으로 성적을 사려 한다’는 반박도 있다. 그러나 귀화 선수 영입은 이미 세계적 추세다. ‘세계 시민화’라는 지구촌 변화의 단면이기도 하다.
평창겨울올림픽에는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많은 19명의 귀화 선수가 출전한다. 한국 전체 선수단의 15%에 이르는 규모다. 바야흐로 스포츠의 다문화·다국적 시대다.
비빔밥은 한국 음식으로 전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대표적 메뉴다. 밥과 고기, 채소가 고소한 참기름, 매콤한 고추장과 한데 어우러져 절묘한 맛을 만들어낸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음식이지만 서구인들에게까지 큰 인기를 누리며 ‘세계화’에 성공했다.
토종과 귀화 선수의 절묘한 궁합혹자는 최근 무서운 기세로 돌풍을 일으키는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잘 만든 한 그릇의 비빔밥에 비유한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선수들을 기반으로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북미에서 아이스하키 선수로 큰 성공을 이루고 돌아온 코칭스태프(백지선 감독, 박용수 코치), 여기에 북미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에서 활약하다 국적을 취득한 귀화 선수들이 어우러져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한국 아이스하키는 철저히 변방으로 여겨졌다. 2011년 7월 평창겨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뒤 남녀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평창올림픽 출전(개최국 자동 출전)이 허용되기까지 3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이 “한국 아이스하키의 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올림픽에서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일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개최국 자동 출전권 부여를 미뤘기 때문이다.
IIHF는 한국 아이스하키에 평창올림픽 자동 출전권 부여의 전제조건으로 ‘올림픽에서 강팀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칠 정도의 경쟁력’을 단기간에 입증하기를 요구했다. IIHF가 해마다 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자신들의 기대치를 충족할 만한 모습을 보이라는 요구였다. 저변이 취약한 한국 아이스하키가 단기간에 전력을 끌어올리려면 혁신적 변화가 필요했다. 이런 배경에서 시작된 것이 ‘태극마크를 달기 원하는 외인’을 대표팀에 수혈하는 것이었다.
‘파란 눈’ 태극전사 1호, 라던스키
캐나다 온타리오주 키치너 출신의 브락 라던스키(안양 한라)는 유소년 시절부터 유망주로 꼽혔다. 미국의 아이스하키 명문 미시간주립대학에 재학 중이던 2002년에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신인 드래프트에서 3라운드 79순위로 에드먼턴 오일러스에 지명됐다.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던컨 키스(시카고 블랙호크스), 라이언 밀러(애너하임 덕스) 등이 라던스키와 함께 미시간주립대학에서 활약하던 선수다.
유망주로 평가받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라던스키지만 살인적 경쟁이 이어지는 북미 아이스하키의 프로 무대 적응은 쉽지 않았다. 라던스키는 2004년 자신을 지명한 에드먼턴 오일러스의 하부리그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3부리그 격인 ECHL에선 대단한 활약을 펼쳤지만 2부리그인 AHL에선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빅 리그’인 NHL 입성의 꿈을 이루기 어렵다고 본 라던스키는 2007년 해외로 눈을 돌렸고, 독일 1부리그(DEL)를 거쳐 2008년 한국 아이스하키의 명가 안양 한라 유니폼을 입었다. 라던스키의 결정은 그의 인생뿐 아니라 한국 아이스하키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라던스키는 안양 한라 유니폼을 입은 뒤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2008~2009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정규리그에서 득점왕·포인트왕·MVP를 싹쓸이했고, 2009~2010 시즌에는 사상 처음으로 안양 한라를 아시아리그 정상으로 이끌며 플레이오프 MVP를 거머쥐었다. IIHF로부터 ‘단기간 경쟁력 입증’이라는 난감한 과제를 떠안은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2013년 ‘외인 수혈’을 하기로 결정했고, 첫 번째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에서 실력을 입증한 라던스키였다.
라던스키는 2013년 3월 ‘체육 분야 우수 인재’ 자격으로 법무부로부터 특별 귀화를 허가받았고, 곧바로 아이스하키 대표팀에 합류했다. 한국 스포츠 사상 한국인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이가 태극마크를 단 첫 번째 사례다. 라던스키는 같은 해 4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2013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에서 5경기에 출전해 3골 2어시스트를 올리며 한국 아이스하키가 세계선수권 역대 최고 성적(2승3패, 승점 5)을 기록하는 데 중추적 구실을 했다. ‘라던스키 효과’를 톡톡히 본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는 2016년까지 해마다 귀화 선수를 추가했고 현재 그 수는 7명에 이른다.
라던스키가 한국 땅을 밟은 지 2017년에 10년이 된다. 피부와 눈동자 색깔은 다르지만 10년간 이 땅에 머물며 ‘진짜 한국 사람’이 다 됐다는 소리를 듣는다. 한국어 ‘스피킹’은 여전히 서툴지만 ‘리스닝’은 가능하다. 김치찌개와 삼겹살을 찾아 먹을 정도로 입맛도 ‘한국화’했다. 안양 한라 입단을 결정한 직후 아내 켈리와 결혼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루시를 얻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기에 한국은 그에게 더욱 특별한 곳이다. 지난해 고관절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지만 ‘평창올림픽 출전’ 꿈을 이루기 위해 장기간의 재활을 거쳐 다시 빙판에 섰다.
미워할 수 없는 악동, 스위프트현재 진행 중인 한국 아이스하키 돌풍은 2016년 4월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린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에서 시작됐다. 홈팀 폴란드를 꺾고 34년 만에 처음 일본을 제압하며 대회 마지막 날까지 1~2위 싸움을 벌였다. 종전 한국 아이스하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돌풍의 중심에는 2014년 1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마이클 스위프트(31·하이원)가 있었다.
스위프트는 카토비체 세계선수권 5경기에서 5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언론이 선정한 베스트6에도 뽑혔다. 오스트리아와의 1차전(2-3연장패)에서 선제골을 터트렸고, 폴란드와의 2차전(4-1승)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3차전에서도 선제 결승골을 터트리며 선봉장 노릇을 했다.
2011년 한국 땅을 밟은 스위프트에 대한 시각은 엇갈렸다.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포인트왕에 네 차례나 오를 정도로 빼어난 공격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에서는 빙판에서의 돌출 행동(승부욕이 강해 거친 반칙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등을 지적하며 ‘다스리기 어려운 선수’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스위프트는 대표팀에서 매우 성실하고 순종적이다. 특유의 승부욕은 여전하지만 ‘튀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고 팀의 일원으로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 대표팀에 대한 그의 애정과 집중도는 이탈리아와의 카토비체 세계선수권 최종전에서 여실히 확인됐다. 스위프트는 0-1로 뒤진 상황에서 상대 골키퍼와 일대일로 마주하는 기회를 잡았지만 득점에 실패했다. 벤치로 돌아온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스틱을 바닥에 내리쳐 부러뜨렸다(골을 넣었으면 흐름이 달라질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쳐 화가 났다). 팀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스위프트는 링크에서는 격정적이지만, 경기장 밖에선 조용하고 평온한 성격이다. 여러 사람이 있을 때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굳이 말로 표현은 않지만 그는 한국을 매우 사랑한다. 아시아리그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맹활약(아시아리그 단일 시즌 최다 골, 최다 어시스트, 최다 포인트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통산 최다 포인트 기록 경신도 눈앞에 두고 있다)을 펼치자 스위스 1부리그(NLA, 유럽에서 연봉 많이 주기로 유명해서 NHL 선수들도 선호하는 리그다) 등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쇄도했디. 그러나 한국에 머물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스위프트 자신은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아이스하키 대표팀에 귀화 선수가 늘어나며 일부에서는 ‘올림픽이 끝나면 원래 나라로 돌아갈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스위프트는 이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올림픽 출전을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고, ‘제2의 고향’ 생활에 만족하며 한국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려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하며 머물고 싶은데, 자신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평창올림픽 이후 모국 캐나다행’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스하키의 거미손 ‘갓 돌턴’현대 아이스하키에서 골키퍼(아이스하키에선 ‘골리’ ‘골텐더’라고 한다)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특히 올림픽, 세계선수권 등 플레이오프에서는 골리가 승부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된 것이 골리 포지션이었다. 르네 파젤 IIHF 회장이 “아이스하키 강국과 경쟁하려면 골리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충고할 정도였다.
한국 아이스하키의 취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수혈된 이가 맷 돌턴(32·안양 한라)이다. 2014년 안양 한라에 입단했고, 2016년 3월 팀 동료 에릭 리건과 함께 한국 국적을 얻었다. 한국 이름은 한라성(漢拏城). 안양 한라팀에서 2015년 한글날을 기념해 지어준 멋진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 아이스하키 팬들 사이에서 흔히 부르는 별칭은 ‘갓 돌턴’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방을 펼치는 그에 대한 경의를 담은 별명이다.
돌턴이 골문을 지킨 이래, 한국 아이스하키는 어떤 팀을 만나도 호락호락 무너지지 않았다. 2017년 12월14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캐나다와의 유로하키투어 채널원컵 1차전은 ‘갓 달튼’의 진면모가 확인된 경기였다.
이 경기에 앞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한국 대표팀이 선수 25명 가운데 23명이 세계 아이스하키리그의 최고봉인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출신으로 구성된 캐나다를 상대로 큰 점수 차로 패배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돌턴의 신들린 선방에 힘입은 한국은 경기 종료 32초 전까지 한 점 승부를 펼친 끝에 2-4로 졌다. 심지어 2피리어드 10분까지는 2-1로 경기를 리드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돌턴은 모국 캐나다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막고, 막고, 막고, 막고, 막고, 또 막았다. 3피리어드 동안 쏟아진 56개 유효슈팅 가운데 53개(세이브)를 막아내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였다. 팬들은 “돌턴이 골문을 지키는 한 어떤 이변 연출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NHL은 세계 아이스하키의 지존이다. 경기력과 연봉 수준에서 어떤 리그와도 비교할 수 없다. 또 국적을 불문하고 세계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는 NHL로 향한다. NHL 다음으로 꼽히는 리그가 KHL(Kontinental Hockey League)이다. 돌턴은 KHL에서 뛰던 2014년 한국행을 결정했다. 세계 2위 리그에서 뛰던 선수가 아시아리그로 이적하는 것은 드문 경우다. 돌턴에 따르면 “KHL은 연봉도 많고 리그 수준도 높지만 생활 여건이 좋지 않았고(그가 뛰던 니즈네캄스크는 공업도시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던 시점에 한국행 제안이 왔고,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돌턴이 한국행을 결정했을 때 캐나다에 있던 가족들은 만류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북한의 위협’이었다. 돌턴은 최근 ‘북핵과 미사일 위기’를 우려하는 캐나다 지인이나 가족에게 “한국 사람들은 그런 걱정을 아예 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라고 답한다. 3년 만에 한국 사람이 다 됐다. 그는 열성 야구 팬이다. 특히 한국 야구를 좋아한다. 두산 베어스의 골수팬으로, 베어스의 잠실 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서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2017년 8월 드디어 원을 풀었다. 우리나라 프로야구뿐 아니라,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의 활약상이 주 관심사일 정도로 한국 야구를 좋아한다.
돌턴의 희망은 아이스하키가 비인기 종목인 한국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특히 자신을 통해 한국인들이 ‘아이스하키 골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아이스하키 골리를 희망하는 어린 선수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갓 돌턴’ 별명을 얻으며, 뛰어난 골리 한 명이 경기 양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확인시켜주고 있으니, 한국인이 된 지 2년 만에 희망을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특별 대접’ 받지 않는 귀화 선수들
평창올림픽이 다가오며 한국 아이스하키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졌다. 대표팀이 소집되면 인터뷰와 취재 요청이 쇄도하는데, 빠지지 않는 질문이 ‘귀화 선수와 토종 선수의 호흡’에 대한 것이다. 외부에서는 잘 섞일 것 같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궁금해할 만하다.
그러나 선수들은 이 질문이 왜 나오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스하키 대표팀 귀화 선수들은 어느 날 갑자기 대표팀에서 뛰기 위해 한국에 온 이들이 아니다. 소속팀에서 오랫동안 함께 뛰었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친숙하다. ‘귀화 선수와 토종 선수의 호흡을 끌어올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에 대해 귀화 선수도, 토종 선수도 할 말이 없다.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한 적도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서로 ‘대표팀을 구성하는 한 명의 선수’라고 생각할 뿐이다.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귀화한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특별 대접’을 받지 않는다. 똑같이 훈련수당을 받고, 같은 식사를 하고, 같은 숙소에 머물고, 같은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 이들은 대표팀에서 뛰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다. 한국에 와서 머물다가 대표팀 제안을 받고 수락했을 뿐이다.
IIHF가 주관하는 아이스하키 국제대회에서는 경기 후 승리한 나라의 국기가 게양되며 국가가 연주된다. 승자에게 주는 특권이다. 귀화 선수들은 태극기가 게양될 때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우렁차게 애국가를 부른다. 벅차고 자랑스러운 감정이 역력하다. 맷 돌턴은 2017년 들어 패드(아이스하키 골리가 다리에 착용하는 장비)에 태극 문양을 그려넣었다. 인터뷰 요청마다 ‘패드에 태극기를 그려넣은 이유’를 물어보는데, 돌턴은 딱히 할 말이 없다. 한국 대표팀 골리가 태극기를 달고 뛰는 게 왜 그렇게 특별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하다.
이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2의 조국’으로 한국을 택했고, 대표 선수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이유가 있을까.
김정민 대한아이스하키협회 홍보팀장·전 스포츠부 기자‘흥행 카드’ NHL은 왜 평창에 오지 않나
‘눈앞 이익’에 조국 등진 NHL
2018 평창겨울올림픽에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선수들이 출전하지 않는다. 아이스하키 팬들, 특히 한국 팬들은 세계 최고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빅 이벤트를 놓치게 됐으니, 못내 아쉬운 일이다.
NHL이 평창에 오지 않는 이유와 배경에 대해 여러 분석이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전적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다. 2017년 4월 개리 뱃맨 NHL 커미셔너가 평창올림픽 출전 불가 방침을 공식 선언했다. NHL 선수 노조는 즉각 반박 성명을 냈고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은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제히 리그의 일방적인 결정에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후 선수노조는 조용했다. 평창행을 위한 노조 차원의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NHL 노조의 침묵은 리그의 평창행 불참에 ‘암묵적 동의’로 볼 수 있다. 이유는 금전적인 데서 찾을 수 있다. NHL은 평창올림픽이 리그 수입을 올리는 데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NHL이 올림픽에 선수들을 출전시키려면 정규리그를 3주간 중단해야 한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출전해 부상을 안고 돌아올 수 있다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광고와 중계 수익을 낼 수 있는 올스타전 같은 이벤트도 포기해야 한다. 이런 ‘눈앞의 이익’을 버리더라도 올림픽 출전으로 새 시장을 개척하고, 장기적 수익을 올린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NHL은 한국 시장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선수노조도 리그의 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NHL 스타 플레이어들은 ‘조국을 위해 뛸 권리’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명분’에 뒤따르는 ‘실리’가 없자 깨끗하게 평창행을 접었다. 리그는 평창올림픽 불참을 공식 선언하기에 앞서, 선수노조에 하나 제안을 했다. 2012년 체결된 현행 CBA(노사단체협약)를 2022년에서 2025년으로 연장한다면 조건 없이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강성 노조로 유명한 NHL은 CBA 갱신 때마다 홍역을 치렀다. 노조가 평창행을 위해 리그의 CBA 연장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리그는 6년의 시간을 벌어 밑질 게 없다. 그러나 선수들은 차마 명분을 위해 실리를 포기하진 못했다.
‘NHL의 평창행을 설득하지 못한 죄’는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다는 사실도 지적하고 싶다. NHL은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의 통제권 밖에 있다. 사실 NHL이 IIHF의 머리 위에 앉았다고 봐도 된다. NHL은 캐나다와 미국뿐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의 선수들이 선망하는 리그다. 경기력은 물론 흥행력과 연봉 수준에서 비교 대상이 없다.
IIHF의 입김이 NHL에 먹히지 않는 이유도 돈 때문이다. IIHF는 1998년 나가노겨울올림픽을 시작으로 그간 NHL 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려왔다. IIHF는 NHL에 어떤 금전적 도움도 주지 못하지만, NHL은 올림픽과 월드챔피언십 출전 등으로 IIHF의 흥행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영향력이 NHL에 작용하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실 NHL의 평창 불참에 단초를 제공한 곳은 IOC다. 이전 대회까지 부담하던 금전 지원(체재비, 보험료 등)을 폐지하겠다는 IOC의 결정은 가뜩이나 겨울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지 않던 NHL에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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