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더 지난 일로 생각된다. 괌에 갔을 때 일이다. 휴가라면 좋았겠지만 출장 중이었다. 괌에 무슨 출장 갈 일이 있는지 의아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기업에 투자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괌에도 투자할 기업은 있다. 휴양지 호텔방에 혼자 있는 게 영 어색해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에 잠에서 깼다. 눈을 뜨고 보니,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호텔방 네 벽이 꿀렁꿀렁 움직이고 바닥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지금 꿈일까? 공포보다는 비현실감 때문에 누운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다행히 흔들림이 멈췄고, 나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혼곤히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일상에 침범한 지진아침에 일어나 식당에 내려갔더니 세상은 아무 일 없었던 듯 평온한 풍경이었다. 업무차 만나기로 했던 현지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서야 어젯밤 일이 꿈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지진이었고, 괌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 등장하던 ‘환태평양 지진대’라는 말이 떠올랐다. 괌이 그 지진대 위에 있다는 사실도 함께.
발밑이 흔들리고 벽이 출렁이는 경험은 내가 이전에 겪은 어떤 경험과도 똑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지진이 좀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비현실감이 공포로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밤의 일은 그저 이국에서 겪은 신기한 체험으로 남았다. 그 일은 괌이라는 타지에서 벌어졌고, 내 일상 밖의 사건이었으며, 나의 집, 내가 속한 땅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겪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덕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1년 전 어느 저녁, 다시 발밑이 흔들리는 감각을 느꼈다. 강도는 약했지만 발밑에 진동이 느껴지는 순간, 잊고 있었던 괌의 그 밤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때의 경험 덕에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진.이다.’
2016년 9월12일, 경상북도 경주시 남서쪽 8㎞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일어난 바로 그날이었다. 그때의 지진은 1978년 지진 관측을 시작한 후 한반도에서 발생한 역대 최대 규모의 지진으로 기록되었다. 경주 부근에 있지 않은 덕에 내가 느낀 지진은 괌에서의 경험보다 그 정도는 훨씬 약했지만 공포심은 비교할 수 없이 생생했다. 지진이 한 번의 이국적 경험, 한 밤의 꿈같은 비현실적 사건이 아니라, 내가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곳, 내 일상의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흔들림을 느끼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냈고,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속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핵발전소들은?’이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월성 핵발전소가 경주에 있고, 울진 핵발전소도 경주에서 제법 가깝다. 무엇보다, 내가 애달프게 사랑하는 조카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산다. 아니나 다를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타임라인은 나 같은 공포를 느낀 사람들의 두려움과 의문으로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정부 발표를 기다리면서도 어떤 공식적인 발표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불안은 똬리를 틀고다음날 아침, 괌에서의 다음날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은 아무 일 없던 듯이 평온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똬리를 틀었다. 숱하게 많은 이가 그 밤 동일한 공포를 느꼈고, 그 공포의 원인은 말끔히 사라지지 않았다. 지진은 언제고 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진이 닥쳤을 때 ‘핵발전소들은?’이라는 질문이 또 떠오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땅으로 돌아오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기이한 체험이 지난해 9월12일 저녁 내 일상에 현실로 파고들었다. 땅의 진동은 1년 전에 멈췄지만, 내 발밑은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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