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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사제

등록 2017-06-29 13:54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일러스트레이션/ 이우만

최근 한국의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와 제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두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하나는 국내 유수의 사립대 이공계 대학원생이 사제폭탄을 만들어 지도교수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이고, 또 하나는 국내 최고의 국립대학 인문계 대학원생이 지도교수의 논문 표절 사례를 낱낱이 조사해 공개함으로써 교수의 학문적·사회적 생명에 결정적 타격을 입힌 사건이다. 대학교수의 대학원 제자에 대한 ‘갑질’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엔 ‘을’인 대학원생이 반격한 사례라는 점에서 파장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을의 반격

지도교수의 부당한 처사에 앙갚음하기 위해 재료를 사 모아 조잡한 성능의 위험한 폭발물을 만들고, 지도교수의 모든 연구 업적을 비교 검토해 무려 1천 쪽에 이르는 표절 사례 보고서를 만들어내기까지 대학원생이 가슴에 품었던 원한을 생각하면 나 역시 대학원생 제자가 있는 교수로서 안타깝고, 한편으로 서늘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하고 싶고, 공부로 자아실현하기 위해 대학원 문을 두드린 그들에겐 잘못이 없다. 전적으로 교수의 잘못이고 대학의 잘못이며 이 사회의 잘못이다.

사제폭탄 사건은 논문 지도 과정에서 발생한 교수와 학생의 갈등이 1차 원인이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교수가 대학·연구소·기업을 막론하고 대학원생 취업에 생사여탈권을 쥔 채 장인-도제 관계를 넘어 주인-노예 관계에 가까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한국 이공계 대학원의 풍토와 깊이 연관돼 있다. 그런 점에서 이공계는 조금 낫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진로 면에서 숨통이 다 막히지는 않아서 봉건적 사제 관계가 지속될 물적 토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교수의 제자 논문 표절 사건은 이공계에 그나마 남아 있는 ‘진로 보장’ 가능성이 애당초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 시대착오적인 봉건적 착취 관계만 남은 인문계 대학원에서 터진 사건이다. 오늘날 한국 인문계 대학원생은 대학 등록금 수입 대상으로 간주되고 교수와 학생 사이도 딱 그만큼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로 전락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한국 인문계 대학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학문 후속 세대인 제자에게 대학교수로의 취업 가능성을 거의 보장할 수 없게 된 지방대나 절대다수 사립대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은 극소수 명문대 대학원에서도 학생들이 대학원 진학을 기피하는 게 현실이다.

대학과 학문공동체의 이런 황혼 풍경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대학교수나 대학 자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오늘날 한국 대학의 위기는 대학 자체의 위기라기보다, 방임과 통제의 엇박자로 일관한 역대 정권이 추진해온 대학 정책의 위기다. 결국 정부가 대학 정책, 혹은 학문 후속 세대 육성 정책에 건곤일척의 해법을 내놓아야 한다. 꿈같은 일처럼 여겨지겠지만 정부가 박사학위 취득 조건 강화를 포함해 지속 가능하고 구체적인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따라 대학원을 졸업한 박사학위 소지자에게 대학·연구소·정부기관 등을 막론하고 완전고용을 보장하는 게 최선책이 될 것이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이렇게 된다면 적어도 대학원에서만큼은 엽기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건전하고 생산적인 학문공동체 풍토가 되살아날 것이 틀림없다.

광에서 인심 난다

새 정부가 희망적인 일을 많이 기획하고 시작하는 지금, 기왕 인심 쓰는 김에 학문 후속 세대의 미래를 위해서도 좀더 쓰는 건 어떨까. 그렇다면 정말 땡큐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계간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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