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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부정해도

태극기집회
등록 2017-03-07 17:54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는, 만만찮은 수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탄핵 각하”를 선언하고 “빨갱이를 죽이자”고 외친다. 진보 언론은 물론 보수 언론마저 국정 농단 파문에서 박근혜가 문제의 핵심임을 지적하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모든 언론이 조작된 뉴스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광장은 종교적 맹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지난 삼일절 집회에서 광장을 메운 태극기 물결은 대체로 50대 이상 장년층이었다. 40대가 5명 중 1명, 20~30대는 100명에 1~2명으로 보였다. 장년층이 광장에서 말하는 핵심 키워드는 ‘반공’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는 단순히 전쟁 트라우마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사실 지금 거리에 나온 장년층 대부분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 세대다.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는 정치적으로 속물적이고, 물질적으로 탐욕적인 생존 전략의 다른 이름이다. 정치적으로 이기려면 비도덕적이 돼야 했고, 생존하려면 지배 세력의 논리에 복종해야 했다. 여기에 저항하는 모든 사람은 ‘빨갱이’로 타자화했다. ‘최순실 게이트’에서 드러난 정경유착과 물밑 거래, 문제 제기자 내치기와 각자도생 등은 한국 사회의 반공주의자들이 살아온 삶의 전략 그 자체다.

게다가 박근혜는 쿠데타라는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권력을 잡은 아버지 박정희와 달리 정당한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다수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잡은 대통령이다. 이 점은 장년층의 삶에서 꽤나 중요하다. 아버지 박정희가 갖지 못한 정치적 정당성을 딸 박근혜가 채우면서, 장년층의 삶을 지배한 박정희주의 한쪽에 크게 결여됐던 어떤 공간이 비로소 채워졌기 때문이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박정희 시대를 살아오면서 비도덕적으로 지배 세력의 논리에 복종하기만 했던 장년층 세대의 반공주의적 삶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2012년 대선에서 한국 사회 다수가 박근혜를 선출해주고, 같은 영화가 흥행한 건 이들의 삶을 완결지어주는 하나의 사회적 인정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해 가을부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했다. 동시에 촛불집회에 나온 젊은 세대가 자신들에게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완결성을 향해 나아가던 삶은 박근혜가 무너지면서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다. 이들이 집회 현장에서 “박근혜가 잘못은 했지만 탄핵을 당할 정도는 아니지 않으냐”고 말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에게 탄핵은 단순히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하는 절차가 아니라 박근혜의 2012년 당선을 부정하는 제도적 승인이다. 그 결정은 또 장년층에게 “이것은 모두 당신들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국가의 공식 선언이다. 이것은 저들에게 큰 고통이다.

고통은 설명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음모론이 등장한다. 언론이 아무리 꼼꼼하게 취재해도, 특검이 아무리 정밀하게 수사해도 진실은 총체적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그 빈틈을 뒤지면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완결된 반박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다. JTBC의 태블릿PC 출처에 대한 음모론이 그렇고, 고영태의 녹취록과 헌법재판소 출석을 둘러싼 음모론이 그렇다.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시계’는 알람을 향해 가고 있다. 탄핵이 결정되면 그들이 그렇게나 부정해도, 박근혜가 끌고 가려던 시대는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물을 필요가 있다. 박근혜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던 한국 사회의 박정희주의는 종말을 고했는가. 정치적으로 속물적이고, 물질적으로 탐욕적인 생존 전략은 정말 박근혜와 함께 사라질까.

이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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