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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주의 종말론

박근혜 이후
등록 2016-11-29 17:10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기자

박근혜는 여전히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지만 ‘이후’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가 물러나도 우린 이 땅에서 계속 살아가야 하고,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박근혜가 사퇴하거나 탄핵되더라도, 혹은 만에 하나 임기를 마치더라도 ‘박근혜 이후’는 조만간 우리 앞에 닥쳐온다. 단지 다음 대통령, 대선 정국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걸 포함한 긴 미래 이야기다.

박근혜 파멸이 곧 “박정희 패러다임의 종말” “박정희 레짐과의 작별”이라는 진단이 쏟아진다. 표상적·상징적 차원에선 동의할 만하다. 그런 변화는 중요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총체적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면 동의하기 어렵다.

‘박정희주의’는 한국인의 마음에 가장 강력히 작용해온 ‘지배 레짐’이다. 우린 반세기 동안 박정희주의의 주술에 사로잡혔고, 박정희주의자로 살았고, 지금도 박정희주의자다. 한국의 유권자 다수는 분배보다 성장을 원하고, 경제 발전만 되면 노동탄압·언론억압 같은 건 눈감아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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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에게 내면화한 박정희주의에 힘입어 당선됐다. 그러나 박근혜가 물러난다고 일거에 박정희주의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무려 50년 넘는 세월 동안 제도로, 문화로, 사고의 습관으로 공동체에 뿌리내린 가치체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박정희주의’,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20년을 거친 박정희주의는 ‘어제의 박정희주의’, 즉 박정희 정권 당시 박정희주의와는 다른 변종이다. 그것은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주의, 관치경제라는 요소가 상당 부분 탈색되고 신자유주의로 ‘트리밍’된 박정희주의다.

하지만 저복지·노동탄압·성과주의·성장지상주의라는 측면에선 또렷한 공통점도 있다. 강자생존의 논리라는 점, 약자우대를 역차별로 여긴다는 점, 저능력자를 돌보지 않는 걸 넘어 혐오하는 과잉능력주의(hyper-meritocracy)라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박정희주의는 밀접한 친연성이 있다. 한국 사회가 놀라울 정도로 신자유주의 체제로 빨리 전환한 배경에는 이런 면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정부의 시장 개입과 규제를 약화하고 최종적으론 무력화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 목표라는 점에서, 규제 지향적 박정희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재벌과 시장자유 지상론자들은 정부가 시장을 규제하면 무조건 관치경제라고 몰아가지만, 역사상 정부가 시장을 규제하지 않은 적은 없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나라가 관치경제를 하는 셈이다. 박정희 경제정책들이 관치경제라 명명되는 것은 단지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고 기업을 규제해서가 아니라, 그 강도와 범위가 이례적으로 세고 넓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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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경악스러운 것은 관치경제가 약해졌는데 정경유착은 예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삼성·국민연금·최순실 게이트’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가가 국민 노후를 위해 모은 연금으로 일개 기업의 상속과 탈세를 돕고 기업은 그 대가로 권력자 측근의 딸에게 말을 사줬다는 스토리, 소설이라 해도 너무 조악해서 믿기 힘들다. 그러나 모든 정황이 그게 사실임을 시사한다.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뒤 지금까지 본 평가손실액은 5900억원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무려 100만 시민이 모여 촛불을 든 이유는 무엇인가. 박근혜 일당의 행적에 경악하고 분노해서다. 나아가 다시는 이런 황망한 사태를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려면 낡은 것과 작별해야 한다.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을 말하고, 정치인은 그 상념을 현실정치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 박정희주의라는 반세기 주술을 ‘탈주술화’하는 것, 그것은 다음 세대에게 고작 이런 사회를 물려준 기성세대의 사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기획하는 출발점이다.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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