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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한 승리, 그리고 남은 것

이화여대 투쟁
등록 2016-08-16 19:52 수정 2020-05-03 04:28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컴퓨터그래픽/ 김민하 <미디어스> 편집장

이화여대 투쟁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들이 ‘이겼다’는 사실이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학생들은 여전히 농성하며 총장 퇴진을 요구하고 있지만(8월11일 현재), 어쨌든 대학 쪽은 계획을 철회했다. 왜 다른 대학들에선 불가능한 일이 이화여대에선 가능했는가? 학생들의 이 희귀한 승리에는 어떤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을까?

이대 학생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첫 번째는 이 학교가 어마한 규모의 동문들이 존재하는 이른바 ‘명문사립대’라는 점이다. 즉, 학교의 명성 그 자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고, 부담은 학생들보다 대학 쪽이 훨씬 크다.

그런데 국민과 언론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학교는 평화시위 중인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병력 1600명 투입’을 결정한다. 최악의 수였다. 그 순간 여론이 기울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즉 미디어 이해도나 활용 역량 면에서 대학은 백치에 가까웠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다.

세 번째 이유 역시 미디어 리터러시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이 싸움이 결국 여론전임을 이해했으며, 자신들이 언론에 어떻게 비칠지도 계산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학생들은 내부의 정치적 의사 표현을 제한하고, 같은 이대 학생이라도 운동권은 배제했으며, 다른 대학 학생들의 지지와 연대 제의까지 차단하면서 자신들의 ‘순수성’을 증명했다. 이런 관점과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논해볼 만하지만, 어쨌건 학생들의 미디어 리터러시가 학교 쪽의 그것보다 높은 수준임은 분명했다. 그 역량 차이가 승패를 예상보다 빨리 가른 요인이었다.

네 번째 이유는 교육부의 평생교육 단과대학(평단) 사업이 지닌 미비함이다. 교육부가 주장하듯, 학령인구가 줄고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평생교육과정을 강화하는 큰 방향은 옳다. 문제는 과연 이 사업이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지다. 이번 사태에서도 드러났듯, 추상적 당위만 가지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평단 사업에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진행 과정에서 대학 사회의 구성원인 학생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교육부와 대학은 늘 그래왔듯 설득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학들이 나랏돈 수주받아 학위 장사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만 증폭했다.

이대생의 승리가 지닌 가장 큰 사회적 의미는, 교육부가 주도해 일방적·폭력적으로 추진돼오던 대학 개혁 혹은 구조조정에 학생들이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이 승리가 가져올 효과는 결코 작지 않다. 평단 사업 대상 학교인 동국대와 인하대의 내부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는 보도가 나왔고, 반대 여론이 높다면 이대처럼 학생들의 강경한 저항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이건 이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대학들이 공히 겪는 구조적 위기의 일단이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많은 총학생회가 즉각 지지와 연대 성명을 발표한 것도 그래서다.

이대생의 투쟁을 두고 ‘학벌주의에 기반한 학력자본 지키기 투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그런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심각하게 생각할 건 그들의 투쟁 방식이었다. 어느 언론은 지도부 없이 모두의 의견을 수렴하는 그들의 방식을 “느린 민주주의”라고 상찬했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 표현을 금지하고 연대를 차단하면서 저항자들의 순수성을 증명하려 했던 모습, 그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 ‘민주주의의 유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든 한국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야말로 근본적 문제겠지만 말이다.

최근 이대에 붙은 ‘나는 순수한 이화인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이번 승리를 곱씹게 만든다. “나는 세월호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있는 페미니스트 성소수자다. 나는 순수한 이화인으로 소속되고자 내 정체성을 숨겼다. 나는 나를 숨길 때에만 존재될 수 있었다.” “이화인이 이뤄내고자 하던 직접민주주의가 정말 이런 것이던가? 진짜 달팽이 같은, 느린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이런 배제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익명의 이화인)”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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