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언덕에 서울시에서는 처음으로 ‘예술인협동조합형공공주택’(이하 막쿱)이 들어섰다. “여기 오신 분들은 전망이 좋다고 하세요.” 이은서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 홍보이사는 5층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빽빽한 건물로 가득 찬 서울에서 조망권은 웃돈이 붙을 정도로 값어치가 있다. 5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계단에는 이곳에 사는 작가들의 작품도 걸려 있다. 이씨는 “6개월 뒤엔 바로 옆에 25층 재개발 아파트가 들어서요”라며 없어지는 조망권에 대한 서운함도 내비쳤지만 이 건물의 첫인상은 ‘살기 좋겠다’는 느낌이다.
막쿱은 2014년 3월 공사를 시작해 올 3월부터 입주가 시작됐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살던 이은서씨는 5월에 이사를 했다. 연극 활동을 하는 그는 “이전보다 집이 작아졌지만 예술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거기서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예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5층 건물이 세 동으로 이루어진 막쿱에는 미술·설치·건축·영화·연극·음악 등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29가구가 모여산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입주자들답게 ‘집을 여는 행사’(오프닝 쇼)를 일주일 동안 했다. 5월30일 개막 행사에 이어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듣는 ‘명작 스캔들’ ‘어린이 연극놀이’ ‘음악 만들기’ ‘영화 감상회’ 등을 진행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 주민도 함께할 수 있는 행사였다. 이곳을 찾은 6월2일에도 만리동 고개 주변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집을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만리동 주변에서 작업실을 구할 생각이에요. 다른 분들도 집 주변으로 작업실을 옮길 생각을 하더라고요. 그러면 이 집(예술인공공주택)의 반경(문화)이 이 주변으로 꽤 넓어지지 않을까요. 저희도 여기를 기반으로 어떻게 활동하면 좋을지 고민 중입니다.”(이은서씨) 만리동 고개 주변은 좁은 골목길을 두고 봉제공장과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그동안 문화를 향유할 만한 공간을 찾기 어려웠다.
자신이 사는 집과 지역의 변화, 이들이 이것을 꿈꾸기까지는 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필요했다. 막쿱은 서울시가 기획하고 SH공사가 관리하는 장기임대주택이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임대주택 8만 호 건설 계획을 밝히면서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을 늘리겠다고 했다. 막쿱 이외에도 서울에는 공동육아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인 강서구 가양동의 ‘이음채’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대문구 홍은동의 ‘이웃기웃’이라는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이 있다.
입주자를 위한 필수 공간, 커뮤니티룸입주 자격은 공공주택의 특성에 따라 다르다. 막쿱의 경우 예술인이면서 수입이 평균소득의 100% 이하면 신청이 가능했다. 입주자들의 공통적인 입주 조건은 집을 관리할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는 것이다. 함께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꾸리는 게 아니라, 같은 집에 살 구성원이 되기 위해 협동조합에 가입해야 하는 방식이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협동조합에서 나온다. 입주자들은 협동조합을 구성한 뒤 집을 어떻게 관리할지, 건물에 만들어진 커뮤니티룸을 어떻게 이용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한다. 집주인의 의견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거나, 관리사무소 일에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일반적인 아파트와 공동주택의 주거 형태와 다르다.
이를 위해 입주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인 커뮤니티룸은 필수적이다. 막쿱은 1층을 커뮤니티룸으로 사용한다. 한쪽에 회의실과 주방이 있고, 가운데 공간은 영화를 함께 보거나 아이들이 체험학습을 할 수 있게 널따랐다. 이곳에서 협동조합 운영회의를 하고, ‘오프닝 쇼’와 같이 주변 주민들과 함께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협동조합과 커뮤니티룸이 입주자들을 친밀한 이웃으로 묶어낸다.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인 ‘이웃기웃’에 사는 임경지씨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적인 원룸에서는 옆집 사람이 더 무섭다거나, 벽 너머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죠. 이웃기웃에 살면서는 집 문을 열어놓을 때가 있어요. 음식이 남으면 나눠먹기도 하고, 이웃을 알고 지내니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전하고 이웃끼리 친밀해지는 점도 있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입주자들에게 또 다른 의미도 던진다. 이은서씨는 건물 관리와 같은 일을 결정할 때 “모든 의사결정을 합의로 하기도 쉽지 않고, 그렇다고 다수결로 결정할 수도 없다”라고 경험을 이야기했다. 입주자들이 옆집 사람들과 어떻게 생각을 맞출지, 공동체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입주자들은 이제 2년마다 보증금과 월세를 걱정하고 이사를 고민하던 것에서 벗어나 매일매일 함께 살아갈 이들과 교류한다. 통·반별로 모이는 반상회 대신 커뮤니티룸에서 함께 밥을 나눠먹는다. 물론 “예비입주자들이 협동조합이라는 형태가 낯설어 입주를 포기하거나, 입주자들끼리 갈등을 겪기도 한다”고 이씨는 귀띔했다.
이웃기웃에 사는 임씨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협동조합에서 건물을 관리하니 분리수거함을 정리하는 것도 입주자들이 돌아가면서 해요. 예전에는 분리수거함에 별 생각 없이 버렸는데, 이제는 내가 아는 이웃 사람이 치우게 되므로 요플레 먹은 것도 씻어서 버리고, 참치캔도 깨끗하게 뚜껑을 따서 버려요. 내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옆 사람에게 그 노동이 전가되니까.” 이른바 하찮은 일은 관리사무소 경비아저씨의 최저임금으로 사는 노동이 아니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웃의 노동’이 된다.
자격만 유지하면 20년까지 지낼 수 있어이런 경험에 대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서울시는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의 예비입주자로 선정되면 교육을 받게 했다. 입주자들은 협동조합의 운영과 비폭력 대화, 공동체 등을 배워야 최종 입주자로 선정될 수 있다. 교육 과정에서 입주자들은 여러 번 만나고 건물 설계에 대한 제안도 하는 등 서로를 알 수 있는 상태에서 협동조합을 꾸린다.
서울시는 지역 공동체 복원에 의미를 둔다.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만 해도 문을 열면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그동안 임대주택 공급이 기초생활수급자나 한부모 가정 등을 대상으로 하는 획일적인 면이 있었다면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은 좀더 지역주민들과 어울리고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윤재한 서울시 공급지원팀장의 설명이다.
윤 팀장은 예산을 투입해 입주자들에게 ‘저렴한 집세’라는 혜택을 주는 장기임대주택을 만드는 게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는 “가양동이나 만리동에 젊은 사람들이 지역주민으로 오는 것을 보고 다른 자치구들도 젊은 사람을 모으기 위해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을 만들고 싶다고 한다. 지을 만한 땅이 없어서 고민이다”라고 전했다.
막쿱의 월세는 주변 시세의 80% 수준이다. 입주자들은 자격만 유지한다면 이곳에서 20년까지 지낼 수 있다. 입주자들은 커뮤니티룸을 쓰는 것에 대한 별도의 월세를 분담하지 않는다. “예술인들은 매달 월세를 내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예요. 주거에 드는 부담만 줄어들더라도 작업에 더 몰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픈 행사 때 온 다른 예술인들이 입주자들을 굉장히 부러워했죠. 우리끼린 진짜 사명감을 가지고 잘 살아야겠다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잘해야 다른 곳에도 예술가들을 위한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이은서씨)
청년들도 월세 부담을 더는 공공주택 공급을 반긴다. 알바노조에서 일하는 하윤정씨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40만원을 내는 방에서 살 때가 삶의 질이 가장 낮았다”고 말한다. 넉넉지 않은 수입에서 주거비용을 빼면 다른 곳에 돈을 쓸 여유가 없다. 하씨는 서울시가 강서구 화곡동에 만들고 있는 청년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의 예비입주자다. “지금 청년 세대를 ‘삼포세대’(취업, 결혼, 집 구입 포기)라고 하는데 집을 산다는 것은 애당초 생각도 못해요. (보증금 마련이 어려워) 전세까지 포기하고 사는 세대죠.”
‘전포세’(전세 포기 세대)를 위해만리동 고개 꼭대기에 있는 막쿱에서 내려오는 길은 가팔랐다. 마을버스도 올라오기 힘든 곳이고 지하철역 등도 멀리 있는게 현실이다. 홍은동 이웃기웃에 사는 임경지씨는 공공주택에 들어가기 위한 최소 보증금 1천만원은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청년들에게 까마득히 높은 조건이라고 했다. 서울시의 협동조합형 공공주택은 ‘살 만한 집’을 꿈꾸는 이들을 위해 좀더 내려올 필요가 있다.
글 이완 기자 wani@hani.co.kr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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