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도의 한 비정부기구(NGO)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여성 A. 그의 남편은 시내에서 자전거택시를 운전한다. 두 사람은 매일매일 열심히 일한다. 합쳐서 월 250달러가량을 번다. 하지만 도시에서 집을 살 수는 없다. 너무 비싸서다. 도시에는 거리를 청소하고 화단을 관리하고 자동차를 모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우리 대부분은 관심이 없다. 주거문제가 절실한 도시인들을 향해 우리는 눈을 크게 떠야 한다.”(비슈누 스와미나탄 ‘아쇼카재단 인도’’ 책임활동가)
#2. “홍콩의 16살 청년 B는 화려한 쇼핑몰 밀집지역 뒤편에 산다. 엄마·누나와 함께 ‘칸막이’ 월세방에 사는데 침대가 하나뿐이라 맨바닥에 누워 잔다. 부엌이 없어 화장실에서 요리를 해야 한다. 나무 판자로 칸막이한 반대쪽 집에는 성매매 여성이 살아서 밤마다 귀를 막아야 한다. 아파트를 네 칸으로 쪼개서 임대하면 건물주가 집세를 4배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의 현대적 건물 사이사이에는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도시 슬럼이 숨어 있다.”(홍콩 사회적 기업 '라이트비' 리키 유 대표)
마천루에 가려진 도시의 주거문제도시의 주거문제는 가려져 있다. 언뜻 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수직으로 치솟은 빌딩과 한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사이사이로 가난의 흔적은 숨어든다. 빈곤층이 많은 인도나, 빈부 격차가 극심한 홍콩이나 비슷하다.
한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서울에서 혼자 사는 청년 10명 중 4명이 고시원, 반지하방, 옥탑방 등에 살며 주거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려면 도시에 살아야 하는데, 도시에 살려면 힘들여 번 돈의 상당액을 비싼 임대료로 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집주인은 집을 쪼개면 쪼갤수록 더 이익이니, 작은 집일수록 평당 임대료가 더 비싸진다. 가난한 사람은 주거비 때문에 점점 가난해지고, 부유한 사람은 임대료 덕분에 점점 부유해진다. 주거문제는 모든 사회문제의 시작이자 끝이다.
주거문제를 ‘사회적 경제’로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아시아의 사회혁신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지난 8월31일 서울시청 8층 다목적홀에서 ‘사회적 경제, 주거문제를 부탁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제2회 아시아 청년 사회혁신가 국제포럼 자리였다.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고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제1062~1065호에 소개된 인도, 필리핀, 홍콩, 한국, 대만, 일본의 사회혁신가 12명이 직접 연사로 나와 주거복지 대안모델과 지속 가능한 주거공동체 등에 대한 생생한 현장 사례를 전했다. 사회적 경제에 관심 있는 서울시민, 비영리단체 활동가, 사회적 기업가 등 400여 명이 자리를 지키며 무대와 객석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중략)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헌법 제35조) 주거권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의 의무를 또렷이 명토 박고 있다. 본디 최소한의 주거를 보장할 책임은 국가가 져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문제에서 그러하듯이, 국가는 문제 해결에서 무능하거나 변화의 속도가 굼뜨다.
비영리 벤처투자단체인 ‘소셜벤처스홍콩’의 프란시스 응아이 대표는 “주거문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수 없으니 사회적 경제로라도 해결해야 한다고 우리가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경제 영역에서 주거 대안을 찾으려는 실험은 세계적으로 점차 확산되는 분위기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공공에 주거문제 해결을 맡겨두는 대신에, 주택협동조합이나 주거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적 기업, 셰어하우스, 주거공동체 등 직접 주거 대안을 찾아나서려는 움직임이 그렇다.
“결국 스스로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서울 하숙집 평균 월세가 40만원이다. 청년 20명이 그 돈을 모아서 20년 동안 함께 거주할 집을 사는 게 더 이익이라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종잣돈 8400만원을 모아서 주택협동조합을 시작했고, 2013년 협동조합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SH공사에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스스로 집을 짓기로 결심했다.”
권지웅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이사장은 “집이 소유권으로만 여겨지고 건설사 중심의 주택 공급 체계를 갖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뭔가 다른 걸 해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 남가좌동에 있는 ‘민달팽이 집’ 2채에는 현재 5세대에 17명의 청년들이 모여살고 있다.
인도에서는 아예 주택시장의 판도를 뒤흔드는 혁신이 일어났다. 사회적 기업이 주도해 저소득층을 위한 새로운 주택시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인도 인구의 97%는 소득을 증명할 근거가 없어, 집을 살 때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집은 비싸고, 정부가 저소득층을 위해 제공하는 공공임대주택 규모는 적다. 아쇼카재단 인도는 부동산 개발업자와 금융권을 끌어들여, 2만달러 이하의 저렴한 집을 많이 짓고 저소득층 구매자에게 소액대출(마이크로파이낸스)을 해주도록 시스템을 마련했다. 시민사회단체도 주택 건설과 프로젝트 평가 과정에 참여한다.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적절한 이익이 돌아가는 ‘혼합가치사슬’ 모델이다.
세계 최대 사회적 기업가 네트워크인 아쇼카재단이 인도에서 2008년부터 시작한 ‘하우징포올’(모두를 위한 주거) 프로젝트로 지금까지 저소득층 15만 가구에 집이 생겼다. 비슈누 스와미나탄 아쇼카재단 인도 책임활동가는 “전체 시장 수요는 2500만 가구로 추정되며, 앞으로 50만 가구에 집을 지어주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홍콩에서도 사회적 기업이 주거문제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싱글맘에게 3년간 주거공간을 제공해주고 자립을 돕는 서비스인 ‘라이트홈’이 대표적이다. 이 서비스를 운영하는 리키 유 대표는 “자신의 여유 자산을 사회에 투자하도록 부유층을 설득하고, 싱글맘의 일자리와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홍콩에서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려면 평균 5~7년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정부가 책임져야 할 주거복지 시스템을 대신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협력자로서 시스템 사이의 빈 구멍을 채워주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싱글맘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임대료를 내는 주거공간은 빈집이나 정부 임대, 부유층의 시설 기부 등을 통해 마련된다.
주거문제는 단지 4개의 벽과 지붕으로 둘러싸인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공동체라는 가치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도에서 농촌공동체의 주거 개선을 돕는 사회적 기업인 ‘드리슈티’의 사티안 미슈라는 “의식주 모두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기본 조건이지만, 주거는 특히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무관심, 삶의 질 하락이 현대사회에서 심각한 것도 주거공동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집이 아닌 공동체를 만드는 기업필리핀 전역에 2500여 개의 마을공동체를 조성한 사회적 기업 ‘가와드칼링가’는 농촌 빈곤층에게 집과 일자리를 제공한다. 호세 루이스 오키네나 ‘가와드칼링가’ 이사는 “필리핀의 농촌 지역에는 공동묘지에서 잠을 잘 정도로 극심한 빈곤을 겪는 이들이 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집이 없어선 안 된다. 우리는 전국 7천 가구 이상에 집을 공급하고 그들과 공동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와드칼링가’를 “집이 아니라 주거공동체를 만드는 기업”이라고 소개했다. 가와드칼링가는 2040년까지 500만 가구의 빈곤 근절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이같은 실험은 마을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기도 한다. 일본 요코하마 고토부키 지역이 대표적이다. 고령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여사는 빈곤 지역인 이곳에선 3년 전부터 빈집을 호스텔로 리모델링하는 실험이 이뤄졌다. 사회적 기업 ‘고토랩’이 관리하는 호스텔 방이 50여 개, 해마다 관광객 1만 명이 찾는다. 마을의 젊은 청년과 주민들이 호스텔 운영·관리에 참여한다.
오카베 도모히코 ‘고토랩’ 대표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삶의 동기, 열정을 불어넣어줄 수 있었다. 어촌 지역인 마쓰야마시에서는 빈집을 빌려서 빈곤층에게 집을 제공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 지역은 인구 고령화로 인해 2035년엔 집 10채 중 1채가 비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빈집 사업으로 마을에 활력이 이는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실험은 여럿이 힘을 합쳐야 가능해진다. ‘가와드칼링가’의 호세 루이스 오키네나 이사는 “초기 활동에 참여했던 기업이 수익이 발생하지 않자 빠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의 경우엔 서로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단체가 협력한 인도 아쇼카재단의 ‘혼합가치사슬’ 모델이 주목받는 이유다.
“주택을 건설하는 기업은 빈곤층이 원하는 요구사항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침대나 냉장고를 놓을 공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주민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정도 규모와 비용의 집을 지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역할은 사회적 기업이나 시민사회단체가 맡아야 한다. 혼합가치사슬 모델이 ‘시장의 원리’를 기반으로 했지만 비영리단체의 참여와 성공을 보장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비슈누 스와미나탄 ‘아쇼카재단 인도’ 책임활동가)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비슈누는 “집이 사회변혁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이는 개개인의 삶으로 증명된다. 인천 서구 검암동에서 20~30대 청년 25명과 함께 주거공동체를 꾸리고 있는 ‘우동사’(우리 동네 사람들)의 조정훈 대표는 “모여살면서 주거비용이 65% 줄어들었다. 그보다 더 좋은 점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고 시간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라고 자랑했다. ‘우동사’ 구성원들은 주말에 함께 농사를 지어 쌀을 조달하고, 마을에 협동조합 카페를 운영하면서 청년자립 플랫폼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 청중이 아시아 청년 사회혁신가들에게 “어떤 순간에 여러분의 활동에 보람을 느끼느냐”고 물었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랑 눈도 못 마주쳤던 한 싱글맘이 자원봉사 활동에서 행복을 느껴 사회복지사가 되었다”(‘라이트비’ 리키 유 대표), “목소리도 작고 자신감 없어하던 친구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권지웅 이사장). 사람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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