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구화 과정이 초래한 세계질서의 본질을 파헤친 <제국>이 던지는 의미
“새로운 역사적 서사이다. 이것은 광범한 현대이론에 대한 비판이자 다가올 에너지들을 예언적으로 불러내는 것이기도 하다.”(프레드릭 제임슨·듀크대 교수)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저작보다도 훨씬 더 실제적으로, ‘공산주의적’으로 계급투쟁과 전투성의 목적론을 위한 근거들을 주장한다.”(에티엔 발리바르·파리10대학 교수)
계급투쟁이 세계화를 촉진시켰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제국>(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 02-720-4572, 2만3천원)에 쏟아진 떠르르한 지식인들의 찬사들을 보노라면, 마치 ‘우리가 지금 21세기 <자본>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화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좀더 분명하게 말한다. “네그리와 하트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우리 시대를 위한 <공산주의 선언>을 다시 쓴 것이다. 즉, <제국>은 결론적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결국 자신의 형태를 폭발시킬 적대들을 산출해내는가를 증명해준다.”
발간 뒤 한동안 떠들썩한 조명을 받는 데 실패했던 <자본>과 달리 비판적 사회과학책으론 드물게 발간 직후 뉴욕 서점가에서 마치 빵처럼 팔려나가는 선풍을 일으켰다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분명 칼 마르크스의 <자본>과 두 가지 닮은 점이 있다. 먼저 <제국>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광범한 현대 이론에 대한 비판이자 새로운 이론적 종합이라는 점에서 <자본>과 닮았다. <제국>은 미국 헌법이론에서부터 포스트포드주의의 생산조직론, 푸코의 권력이론과 데리다의 해체론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하나의 통합적 서사로 묶어내고 있다. <자본> 역시 그때까지 지배력을 행사했던 여러 주류 정치경제학 이론의 종합으로 제시됐다. <뉴욕타임스>는 “무엇보다 <제국>은 박식함을 제공한다”며 “이 다음 세대의 마스터 이론이 되기 위해 필요한 지구력이나 호소력을 지니는가는 시기상조의 물음이지만, 당장은 <제국>이 인문학의 공허함을 채워주고 있다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평했다.
동시에 <제국>은 기존의 다양한 흐름 모두와 부닥치며 그 시각들을 거꾸로 뒤집는다는 점에서도 <자본>과 닮았다. <자본>은 기존 정치경제학의 성과들을 종합한 위에서 잉여가치론의 관점에 기반해 기존 이론들의 전제 자체를 전복시켰다. <제국>은 세계화로 통칭되는 새로운 세계질서의 구성에 관한 다양한 기존의 패러다임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는 금방 이 이론들 전체에 발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그 문제제기의 근거에서도 <제국>은 <자본>의 방향을 충실히 따른다. <자본>은 순수한 자본의 운동결과로 자본주의의 변천을 바라보는 대신, 노동자와 자본가의 투쟁이야말로 자본의 변이를 부른 직접적 계기였다고 보는 계급투쟁의 시각을 곳곳에서 강조한다. 선험적 계급이 있고 계급투쟁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효과로 계급이 구성되며, 그에 따라 자본의 생산양식도 변화한다는 시각은 <제국>에서 한층 확장돼 적용된다. 그동안 숱한 학자들의 관심사로 다뤄져온 세계화의 문제를 두고 <제국>은 바로 이 계급투쟁의 관점을 일관되게 제시한다.
세계화는 변혁의 가능성
세계화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우파의 극단적 옹호론과 좌파의 극단적 비난으로 양분돼왔다. 이른바 좌파 민중운동 진영에선 일국적 보호막에 의해 지탱돼온 개인의 삶을 공격하는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며 그에 대한 저항과 분쇄를 주창해왔다. 그러나 <제국>에 따르면 이는 이해할 수는 있지만, 분명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다. 세계화는 자본의 공세적이고 주도적 선택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근대적 권력들에 대항하는 다양한 대중(multidude)들의 해방욕망에 의해 추동된 계급투쟁의 결과라는 것이 이 책의 입론이다. “대중은 제국을 낳았다.” 따라서 세계화는 거부할 수 없으며, 거부해서도 안 되는 흐름이다. 다만 새로운 변혁의 가능성을 낳는 변화된 조건일 뿐이다.
이런 주장의 타당성은 세계화의 핵심이라고 할 자본주의시장의 전 지구적 확장을 불러온 계기를 살펴봄으로써 검토될 수 있다. <제국>은 세계화는 자본가적 기업가 정신의 열매이기는커녕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의 대량생산체제와 연결된 훈육체제가 노동자들의 변화한 욕망과 반발에 부닥치자 그 반작용으로 구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1968년 혁명 이후 광범위하게 번져간 노동과 가족거부, 지식과 지적노동에 대한 가치부여 등은 이전까지의 노동윤리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적 투쟁들은 재생산 비용과 사회적 임금 수준을 높이며 자본축적의 위기를 초래했다. 지식정보산업의 개화는 이러한 요인들로부터 강제된 자본의 불가피한 선회였다. 거대한 공장 안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일시에 통제하는 기존의 산업구조는 컴퓨터와 초고속통신망을 통해 산발적으로 네트워크화된 세계 곳곳의 노동자들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초국적 금융자본과 정보·문화산업자본들의 득세는 이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이런 전 지구화의 과정이 초래한 세계질서가 다름아닌 ‘제국’(empire)이다. ‘제국’은 국민국가와 초국적기업 및 유엔,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 수많은 비정부기구(NGO) 등의 다양한 권력형태가 혼합된 전 지구적 권력질서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자본의 운동을 도와온 국민국가는 국경을 뛰어넘는 자본의 확장욕 앞에서 점점 움츠러들지만, 여전히 하나의 위계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경쟁상대 없는 강대한 군사력에 기반해 ‘제국’의 전 지구적 권력질서에서 정점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적 역할은 하나의 국민국가로서의 이익보다는 ‘제국’ 전체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보증하는 체계의 균형상태를 유지하는 것과 더 큰 관련이 있다고 한다. 가령 걸프전은 미국이 제국적 주권 아래의 평화와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일탈적 세력을 향해 벌인 경찰력의 행사로 분석된다.
미국 애국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런 점에서 ‘제국’은 이전의 제국주의(imperialism)와도 분명한 차별선을 긋는다. 제국주의는 비록 자본의 일국적 영토를 넘어선 확장을 부추기고 지원한 체제였지만, 국민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바로 국민국가의 확장체인 제국주의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의 비극적 결과였다. 그러나 제국은 이미 이러한 일국적 주권의 경계선을 지워버리고 있다. 제국 내의 위계제에서 특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조차도 국민국가 주권의 쇠퇴와 전세계적인 네트워크화에 따른 개방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뉴욕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브라질의 초국적 기업 노동자는 모두 자본의 지배 아래 종속되고 착취당한다는 점에서 닮아가고 있다. 이때 착취는 잉여노동을 빼앗긴다는 추상적 차원을 넘어 삶의 전 영역을 요동치는 시장에 저당잡히게 된다는 구체적인 차원의 동질성을 갖는다. 김우창 교수는 ‘미국인으로 태어나는 것과 시에라리온(아프리카의 빈국)인으로 태어나는 것의 본질적 차이’를 이야기했지만, 제국 안에서 모든 ‘노동자’는 본질적이라기보다 정도의 차이를 가질 뿐이다.
9·11 테러는 이런 <제국>의 통찰력에 대한 상반된 물음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강화된 미국의 애국주의를 지적한다. 미국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진 것 아니냐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테러와 전쟁의 성격을 가리킨다. 자본주의적 세속화에 반대한 이슬람 근본주의의 도전이야말로 전 지구적 제국질서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며, 그 저항의 방식 또한 나라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네트워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선 수많은 독서그룹이 조직돼 <제국>을 읽으며 이 물음을 곰곰이 따져보고 있다고 한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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