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하나님과 알라는 다른 존재인가

등록 2001-10-17 00:00 수정 2020-05-02 04:22

‘다른 신’에도 경의를 표하는 종교적 다원주의가 대세…한국 주류 기독교의 답답한 근본주의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품어봤음직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해보자. 알라와 하나님은 같은가, 다른가?

펄쩍 뛰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불경한 생각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며 성호를 긋는 이들도 있을 터이다. 서울 어느 지하철역의 맨발 전도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 쓴 팻말을 휘두르며 마귀 사탄을 몰아낼 듯 돌진해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별다른 동요없이 담담하게 대답할 이들도 없지는 않다. 사실 알라와 하나님은 같은 존재라고. 아니, 알라와 하나님만이 아니라 실은 동학의 한울님도 이들과 다르지 않게 유일한 절대자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고 말이다. 1893년 시카고세계종교대회를 조직했던 장로교 목사 존 헨리 배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의 섭리에는 오직 하나만이 아닌 더 많은 길이 있다. 인도 옛 베다의 지혜는 ‘진리는 한분이시다. 성인들이 다른 이름으로 그분을 불렀을 뿐’이라고 가르쳤다.”

“교회밖에 구원없다”는 낡은 명제

이슬람의 알라는 어떤 존재인가. 이슬람은 유일신을 믿고 그의 뜻에 완전히 복종함을 뜻한다. 알라란 여러 신 가운데 특정한 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신(영어의 the God)을 말한다. 기독교의 하나님과 마찬가지다. 한국의 무슬림들은 알라를 하나님으로 번역해 부른다.

종교사적으로도 알라와 하나님은 동일한 존재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둘 다 유대교의 유일신 개념을 이어받고 있다. 기독교에서 절대자를 부르는 또다른 이름인 여호와는 이스라엘 민족이 부르는 신의 호칭일 뿐이다. 유대 민족이 여호와라 부른 유일신을 아랍인은 알라라 부르고 한국의 기독교인은 하나님이라 부른다는 인식은 비교종교학의 상식에 속한다.

신에 대한 믿음의 학문인 기독신학에서도 이런 인식은 진작부터 폭넓게 통용되는 패러다임이 됐다. 서유럽의 다수 기독교인들은 수십년 전부터 이런 논리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절대자는 하나이며 알라, 여호와, 한울님이란 그 다양한 표현양식일 뿐이라는 다원주의적 견해는 현대 신학의 주류를 이룬다. 종교철학자 존 힉은 “신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상식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 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단시된다. 한국 기독교계다. 전부는 아니지만, 근본주의 신학에 기반한 주류 개신교단의 일반적 반응이다.

세계 기독교계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버리고 포용의 단계를 거쳐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지만, 한국의 개신교계는 그런 변화에 눈감고 있다. 고 변선환 박사는 1992년 종교 다원주의를 주창하다 신학대 학장과 목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단군상 파괴와 빈번한 훼불사건은 한국 보수 기독교계의 타종교에 대한 배척의 정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근본주의 신학은 “성서를 출발점으로 보는 교리적 전통”이며 “신앙이란 전통을 통하여 계시된 진리를 신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성서에 기록된 문자의 의미를 자구 하나하나 그대로 신봉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성서의 일점일획조차 오직 믿고 따라야 할 진리와 사실이라고 보는 문자주의적 성경관은 한국 기독교계 주류를 강고하게 지배하고 있다. 성경무오설(聖經無誤說)이라 불리는 이런 믿음에 따라 수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부활 △인간의 죄성 △대속 △예수의 재림과 심판 등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인정하고 의심없이 믿어야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예수는 없다>).이런 견해에 서면, 위의 교리가 결여된 유교나 불교, 동학, 힌두교, 이슬람 등의 여타종교는 우상숭배이거나 기껏 이단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니케아 종교회의(325년)를 거쳐 플로렌스 종교회의(1438∼1445)에서 확립된 “교회밖에 구원없다”는 오랜 명제는 이런 인식의 단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미 문화적, 종교적으로 다원화한 현대사회에서 이런 배타주의가 더이상 지속될 수 없음 또한 분명해지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통해 로마 교황청은 2천년을 유지해온 배타주의의 원칙을 포기하고 포용주의로의 전환을 선포한다. “가톨릭 교회는 다른 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

개신교단의 변화도 못지않게 가파랐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종교대화국은 바아르선언(1990)을 통해 WCC 신학노선의 일대전환을 알렸다. “하나님의 구원활동은 예수의 기독교 성립 이전부터 모든 민족과 역사와 전통 속에 현존해왔으며 모든 종교적 영성활동을 통해 임재해왔다.” 당연히 종교의 다원성은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아니며, 신과 인간을 더 깊이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한국 기독교 배타주의의 기원은?

한국사회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종교적 갈래를 품어왔다. 기독교 전래에 앞서 이미 유교와 도교, 불교 등 다양한 세계적 종교가 사람들의 삶 깊숙이 영향을 끼쳐왔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급속한 기독교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종교도 지배적 위치에 올라서진 못했다. 종교적 다원성은 한국사회에선 추구해야 할 지향이기 이전에 이미 주어진 현실의 조건인 셈이다.

이런 객관적 조건에도 부응하지 못하는 한국 기독교 배타주의의 연원은 19세기 말로 거슬러올라간다. 다원주의 신학자들은 서구 선교사들의 문화제국주의적 선교신학 및 선교정책을 그 뿌리로 든다. 당시 한국인들의 종교적 가치체계를 ‘이교세계’의 미신 내지 악마적 소산쯤으로 매도하고,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주입시켰던 공격적 선교신학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대착오적으로 견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발간돼 화제를 불렀던 <예수는 없다>(오강남 지음, 현암사 펴냄)는 이런 한국 기독교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한층 격렬하게 문제를 던진다. 캐나다 리자이나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는 저자는 한국 기독교는 신앙 전파의 본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종교적 유아성에 머물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런 정신적 식민성에 머무르는 한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 본래의 영적 본질에 접근하지도 못할뿐더러, 타종교와의 화해와 공존과도 담을 쌓게 될 뿐이라고 그는 우려한다.

지금 세계는 묵시론적 담론들로 뒤덮이고 있다. 수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십자군 전쟁’이며 ‘종교문명의 충돌’ 같은 배타성의 언어들이 칼춤을 추고 있다. 다시 한국을 보자. “19세기에 팽배하던 군국주의적 사고의 잔재에 발맞춰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등 전의를 불태우는 군가 같은 찬송을 부르기도 한다. 자기들의 믿음을 만방에 전하겠다는 공격적인 선교사업에 돌진한다.”(<예수는 없다>)



신은 진화한다?

종교 다원주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 위에서, 영성의 다양한 발현양태로서 여러 종교의 공존을 주장한다. 그러나 신의 관념 자체도 역사적으로 다양한 도전을 받아왔다.
기독교의 신은 만물의 창조주이자 궁극적 지배자로 제시된다. 애초 유대교의 신관은 유일신 개념을 띠지 않았다. 여호와는 여러 신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빌론의 유수를 통해 조로아스터교의 창조 및 선악대결 등의 교리를 흡수하면서 보편적인 유일신 개념을 확립하게 된다. 기독교는 여기에 더해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지적 공헌에 힘입어 그리스 철학의 로고스 개념을 중심으로 기독신관의 뼈대를 세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발전과 함께 창조주이자 궁극적 동인으로서의 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 근대과학은 물질 자체로부터 생성의 기원을 찾으려 했다. 신을 초월적 창조주로서가 아니라 만물에 내재하는 운행법칙으로 바라보는 이신론, 또는 범신론은 과학의 도전에 대한 신학적 타협이었다.
포이에르바흐는 나아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신을 인간의 유적 속성의 투영이라고 규정한다. 이로써 신은 인간의 집단적 속성을 반영한 객관적 의식에 지나지 않게 됐다.
마르크스주의는 신을 물질적 사회관계의 반영물로 이해한다. 엥겔스는 신은 인간의 지적 미성숙의 산물이자, 은폐된 계급관계가 조장하는 소외에 대한 집단적 두려움의 반영으로 봤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