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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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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도 떠나지 않는 삼성

무노조 경영에 맞서다 위치추적·감시·미행당하고 14년 전 해고된 김갑수씨…

후유증 여전하지만 노동조합 만드는 조력자 역할 도맡아
등록 2014-06-13 17:20 수정 2020-05-03 04:27
<font color="#638F03">3세 승계를 앞두고 삼성의 사회적 책임이 다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76년에 이르는 무노조 경영은 추상적 문구가 아니었다. 노조를 만들려 나선 삼성 노동자에게 무노조 경영은 무서운 ‘빅브러더’가 되어 일상에 파고들고 일생을 잠식했다. 최근에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을 만들려 했던 젊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무노조 경영이 개인에겐 어떤 고통을 안겨주는지, 직접 겪은 이들의 얘기를 세 차례에 걸쳐 들어본다. _편집자</font>


삼성SDI의 전신인 삼성전관에서 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김갑수씨. 삼성을 떠난 다음에도 일상 하나하나에 삼성을 의식하며 조심하게 되는 후유증을 겪었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제공

삼성SDI의 전신인 삼성전관에서 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김갑수씨. 삼성을 떠난 다음에도 일상 하나하나에 삼성을 의식하며 조심하게 되는 후유증을 겪었다. 삼성노동인권지킴이 제공

20여 년째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 무노조를 경영이념으로 삼는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남들은 그 꿈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할지 모르고, 굳이 필요 없는 일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그 꿈은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이었고, 삶의 방향이었다. 그의 이름은 김갑수. 그는 오늘도 꿈꾼다. 76년간의 무노조 삼성에 노동조합이 생기는 꿈을.

<font size="3"><font color="#006699">차라리 다른 곳에 들어갔더라면</font></font>

위치추적, 감시, 협박, 미행, 납치 등 살면서 한 번도 겪기 힘든 일들이 그의 삶을 찾아온 것은 삼성에서 노동조합 만들기를 시도하면서부터였다. 1987년 23살에 그는 삼성SDI의 전신인 삼성전관에 입사했다. 딱히 삼성이라는 회사가 욕심난 것도 아니었단다. 그저 장사를 해보려다 적성에 안 맞아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많이 다녔던 삼성에 들어가게 되었을 뿐이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그 말이, 딱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가 만약 삼성에 입사하지 않고 장사를 했더라면, 다른 곳에 들어갔더라면 이렇게 모진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참 인생이란 얄궂다.

그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보통 12시간씩 일했다. 일요일에도 쉬지 못했지만 선배들도 다 그렇게 일하니, 직장생활이란 게 이런 거려니 생각했던, 착실한 젊은이였다. 그의 착실함을 회사도 알아봤는지, 회사에서 선행상을 받은 적도 있다 했다. 그런 그에게 삶을 뒤흔들어놓을 한 사건이 찾아왔다. 그는 1994년쯤으로 기억했다. 브라운관을 만드는 공정에서 브라운관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몇몇은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사고였다. 브라운관이 터지는 사고는 현장을 요동치게 했다. 현장 노동자들은 안전을 위협당한 것에 대한 저항의 메시지로 작업을 거부했다. 회사도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에 놀랐는지, 공장장은 금세 사원들의 요구안을 들어주겠다고 나섰다.

이렇게 힘을 모으면 바꿀 수 있는 거구나, 당시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삼성을 아직 잘 몰랐던 순진한 생각일 뿐이었다. 현장 상황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작업 거부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차례로 퇴사 조치된 거였다. 현장 노동자들이 더 들고일어나지 못하게, 회사는 나름의 작전을 시행했다. 노동자 편을 든다던 노사협의회도 실제 현장에서 일이 터지면 회사 편을 들었다. 아무도 현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상황, 그는 노동조합만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을 만들려면 노사협의회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그는 1999년 노사협의회 위원에 출마했다. 그때부터 그의 삶은 평온한 일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저 아이에게 맛난 거 하나 더 먹여주고 싶은 아버지였던 그는, 동료들에게 선량한 마음을 베푸는 게 최고라 생각했던 그는, 회사에서 제대로 찍힌 문제 사원, 불순분자가 돼 있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회사 차량에 태워져 전국 곳곳을 </font></font>

그와 뜻을 함께했던 동료들은 이미 말레이시아, 중국, 멕시코 등지의 주재원으로 쫓겨갔다. 동료들을 내쫓은 회사의 검은손은 그에게도 뻗쳐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인사고과에서 최하점을 주는 것은 물론, 부당한 징계로 그를 괴롭혔다. 시시때때로 2박3일, 3박4일 강제로 데리고 나가 회사 말을 듣도록 강요했다. 심지어 출장 명목으로 일본에까지 끌고 나가 몇 날 며칠을 호텔에 가둬두기도 했다. 공포란 이런 걸까? 다 ‘아니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속에 나만 혼자 ‘예’라고 말하는 것. ‘예’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건 ‘아니요’라고 하루 종일 반복하는 것. 회사 차량에 태워져 전국 곳곳을 돌면서, 일본으로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하면서 그는 불안감과 공포로 온몸을 떨었다.

회사에서 해고된 지 14년. 회사를 떠난 지 오래됐지만 당시 겪은 후유증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 벌어진 일들에 신체가 아닌, 그의 정신이 속박당한 탓이었으리라. 오래된 일이지만 어젯밤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되는 일들. 그는 현재까지도 그 고통 속에 살고 있었다. 삼성의 로고를 보면, 언론에서 삼성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화가, 분노가, 슬픔이, 당시 겪었던 아픔이 또렷이 되살아온다. 언제쯤 삼성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통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찾아왔다. 김갑수씨가 회사 편에 서지 않자, 삼성은 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까지도 뒤흔들어놓았다. 외국 주재원 자리를 제안하며 자신 몰래 아이와 어머니를 만나고, 심지어 아이 학교 선생님과도 면담을 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해 해외에 나가서 사는 게 필요하지 않냐’며 회유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 삼성은 ‘병원비가 필요하지 않냐’며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당시 입을 악다물며 거절했던 그. 지금은 담담히 이야기하지만, 그가 겪은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었다.

삼성에서 겪었던 모진 세월은 철저하게 자신의 생활 하나하나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 금전적 문제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주변을 의식하게 되었다. 신호위반을 하면 삼성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새 옷을 한 벌 입더라도 ‘삼성에서 돈 받은 거 아냐’라는 의심에 걱정이 먼저 앞섰다. 어디다 하소연할 수 없이 되어버린, 삼성에서 보여줬던 무노조 경영이념은 그의 삶을 결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을 포기하지 않는 건, 그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자 그의 꿈이기 때문일 것이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그가 겪은 아픔 되풀이되지 않길 </font></font>

그는 여전히 삼성에서 살고 있다. 평범하게 농사일을 돌보면서도, 노동조합을 준비하는 동료들을 만나고, 후배들을 만나서 조언을 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을 만드는 중요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바람 때문이었는지, 삼성 계열사 곳곳에서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그들이 겪지 말기를, 그런 고통은 자신 하나로 끝나길 그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76년간이라는 무노조의 세월, 인생 절반을 그 세월과 교집합으로 살고 있는 그. 이제 그와 같은 아픔은 사라져야 하지 않겠나. 무노조 76년은 너무 길었다.

조대환 삼성노동인권지킴이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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