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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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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진) 유리창이로소이다

등록 2014-03-05 18:26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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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휴일, 나는 친구들과 함께 도심을 약간 벗어난 서울 외곽의 공장지대로 마실을 나갔다. 휴일이면 어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올 법도 할 테지만 그렇게 휴일마다 레포츠를 즐길 만한 시간과 금전적 여유는 아쉽게도 없고, 서울 밖으로 나가 살아본 적이 없는 서울 촌놈이기 때문에 외곽의 지은 지 50년은 더 돼 보이는 공장의 굴뚝만 봐도 목가적이라고 느끼는 무미건조한 도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세련된 도시인이냐면 그건 또 아니고.

휴일의 공단지역 마실

그렇게 골목골목을 즐겁게 돌아다니고 남의 공장 옥상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수다를 떨던 중 친구들과 나는 이 동네에서 제일 높아 보이는 건물 하나를 바라보았다. 빨간 벽돌로 쌓은 10층 정도 돼 보이는 건물이었다. 우화 ‘시골쥐와 서울쥐’의 서울쥐가 된 것처럼 나는 “일하는 곳 근처엔 유리로 만든 고층 건물만 가득하다”는 말을 꺼냈고, 우리는 유리 건축물의 문제점에 대해 이것저것 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일행 중 그 도심의 높고 번쩍이는 빌딩 안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 사람은 전혀 없어 보였으나 알 게 뭐야. 무슨 불만을 이야기하는 데 특별히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식빵 잘라놓은 것같이 생긴 서울시청의 새 건물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유리 건물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직사광선에 너무 많이 노출돼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심한 편이라는 이야기도 하고, 자영업자인 나는 역시나 냉난방비가 많이 나올 것이라는 괜한 남 걱정을 했다. 그런 건물 안에서 누가 12시간 넘게 있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겠으나, 그 화려하고 단단한 외관과 달리 썩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는다는 생각은 같았다.

이런 푸념을 하던 중 의식의 흐름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법정에서 들었던 범죄심리학 용어인 ‘깨진 유리창 이론’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경미한 범죄를 방치하면 큰 범죄를 일으킨다는 무시무시한 이론인데, 실제 법정에서 근엄한 목소리로 들은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트라우마까진 아니더라도 가끔씩 생각나는 단어다. 검사님께서 70장이 넘는 상고이유서를 쓰게 한 경미한 범죄라는 게 무엇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깨진 유리창 신세가 된 나는 과연 무엇이 깨어지지 않아야 하며, 그 유리창 안에 어떤 보물단지가 있기에 저렇게 애지중지하실까 궁금해졌다. 저 낮에는 직사광선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다는 유리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물론이고 검사님이 말씀하신 깨지지 않는 유리창은 더더욱.

검사님의 ‘깨진 유리창 이론’

세상일이 효율적으로만 돌아간다면 그것도 우스운 꼴이겠으나, 비비탄과 압력밥솥 혁명론을 진지하게 이야기한 바람에 긴 세월을 유리는 고사하고 단단한 철문을 바라보며 살 위기에 놓인 분들 이야기도 한편으로는 우습고, 영세 자영업자인 나는 거액의 냉난방비를 부어가며 반짝임을 과시하는 건물들도 우스웠고, 검사가 눈에 불을 켜며 대남 적화 야욕에 놀아났다는 그 깨진 유리창이 나라는 주장도 우스웠다. 그리고 이런 그림들을 보며 함께 우스워했던 나와 내 친구들은 모여서 더 많은 깨진 유리창들을 찾기로 했다. 국가의 미감에 벗어난 탓에 깨진 유리창 취급받는 것들을 모아서 상을 주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그들을 벌할 권력은 당연히 없고 있는 것은 시간과 그들을 찾아다닐 정도의 열의니까. 그리고 나는 애국자니까 검사님이 깨진 유리창이라고 하셨으면 그 역할을 열심히 해야지. 다이내믹 코리아.

박정근 사진관 사장 겸 국가보안법 피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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