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인터뷰 뒤 배미향 PD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가 자신의 인터뷰를 읽고 전해온 짧은 소감이 생각난다. “‘배미향의 음악세계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아 안도했다’는 대목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어요. 저에게 특별한 위로였어요.” 그렇겠구나. 내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나 관전평만큼 위로가 되는 게 또 있을까.
윤민석에 대한 어떤 ‘부채감’그런 점에서 본다면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은 특별한 사람이다. 제주도의 돌담처럼 엉성해 보이는데 어떤 강풍에도 무너진 적이 없다. 그게 그렇게 안심이 된다.
지난 세월 거의 모든 집회 현장에는 윤민석이 작곡한 수백 곡의 노래가 함께 있었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출정식에서, 탄핵 정국에서, 희망버스 안에서, 촛불집회 현장에서 사람들은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목청껏 부르며 결의를 다지기도 위로를 받기도 용기를 얻기도 했다. 누구 말대로 저작권료를 챙겼다면 떼부자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노래의 저작권료를 한 푼도 받지 않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30년을 버텨왔다.
재작년 9월, 의미 있는 음악회 하나가 열렸다. 이름하여 윤민석 음악회. 암 투병 중인 윤민석 아내의 치료비를 모금하기 위한 행사였다. 윤민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한 이 행사를 통해 보름 만에 1억5천만원이 모였고 음악회 당일에는 수천 명이 참석해 함께 웃고 울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윤민석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 기적 같은 광경을 목도하며 나는 전율했다. 어떤 형태로든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한 행사라고 생각했다.
가계부채 1천조원 시대라서 심란함이 가중될까 걱정스럽지만, 부채와 부채감(感)은 다르다. 부채가 객관적인 채무 상태를 이른다면 부채감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감정이다. 사람마다 다르고 부채의 크기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영화 에서 국밥값을 떼어먹고 달아났던 고시 준비생이 훗날 변호사가 돼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와 외상값을 갚으려 할 때 국밥집 아줌마가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묵은 빚은 돈으로 갚는 거 아이다. 얼굴하고 발로 갚는 기다. 자주 오라꼬.’ 그러면서 울먹이는 변호사의 등을 두드리며 말한다. ‘그기 뭐라고 여태 얹혔노.’ 누군가에겐 몇천원의 국밥값이 몇 년 동안 체기를 유발할 만큼 엄청난 부채감으로 존재한다. 그걸 어떤 이들은 염치라고 한다.
음악회가 점화장치 역할을 했겠지만 그건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 마음속에 윤민석에 대한 어떤 부채감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사람들은 윤민석에게 무슨 빚을 진 것일까. 왜 빚을 졌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윤민석은 자신에게 부채감을 느낀다는 사람들 때문에 부담감은 없을까. 그 해답 속에 윤민석이란 사람의 실체가 가장 생생하게 들어 있다고 느껴져 그런 관점에서 천천히 묻고 긴 호흡으로 들었다. 윤민석이란 사람이 유난할 정도로 섬세하고 다정해서 더 그랬다.
인터뷰 일정도 아내의 병간호에 지장이 없도록 조정해야 할 만큼 현재 그의 제1 관심사는 아내다. 아내 양윤경씨의 근황부터 물었다.
“사람 한번에 묶어세울 혁명의 무기”-아내는 요즘 어떤가요.
=2008년 10년 만에 암이 재발했어요. 그러다가 재작년에 굉장히 위험한 지경까지 갔었는데 좀 호전돼서 더 진행은 안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도 아내를 돌봐야 해서 제가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워요.
-양윤경씨도 원래 가수지요.
=노래패 ‘조국과 청춘’의 보컬이었는데 저는 아내를 여자로서보다 가수로서 더 사모한 측면이 있어요. 사실 운동판에서 부르는 노래는 시위대 성가 부르듯 뻔하거든요. 근데 그 친구는 표현이 굉장히 풍부한 가수였죠.
-무엇이든 음악과 관련이 깊군요.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셨나요.
=어릴 때 굉장히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음악도 잘하고 뭐든 잘하는 슈퍼맨으로 키우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2학년 때는 기타를, 4학년 때는 피아노를 가르쳤죠. 대학에 와선 음악다방에서 DJ도 하고 이태원에서 기타 치는 아르바이트도 했습니다. 그때는 데모하는 애들을 욕하고 다녔습니다. 집에서는 고추 팔고 깻잎 팔아서 공부시켜놨더니 뻘짓하고 다닌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180도 바뀌었나요.
=대학교 3학년 때 흑백으로 프린트된 사진을 봤는데 그게 광주 학살 사진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나니 제가 하는 공부며 뭐며 다 의미가 없어지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모르게 휴학계를 냈고 음악에 관심이 있었으니까 노래패 만드는 일에 나서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민중가요를 만드는 게 내 일이 된 거죠.
-음악이 윤민석씨에겐 뭔가요.
=처음에는 아버지가 배우게 한 취미였는데 운동을 시작하면서는 혁명의 무기라고 생각했어요. 사람을 한번에 묶어세울, 떨쳐일어나는 데 힘을 줄 수 있는 거요. 그런 노래를 만드는 게 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거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내가 만든 노래에 부끄럽지 않게 사는 거였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민중가요 작곡가는 상업가요를 만드는 사람과 다릅니다. 상업가요를 만드는 사람은 노래를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기만 하면 되지만 민중가요는 내가 노래에서 ‘나가자 싸우자’ 그랬으면 나도 나가야 하고,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죠. 내 노래로 고무받고 힘을 얻었던 사람들에게 내 삶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민중가요 작곡가는 음악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 못지않게 삶 자체도 혁명가의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드러운 평소 태도와 달리 그의 목소리가 단호하고 높아졌다. ‘혁명가의 삶’이란 단어가 비수처럼 꽂혔다. 자세히 물어야겠구나.
-음악이 툴(tool)이었던 거네요.
=그렇죠. 툴이었죠. 전형적인 툴이었죠. 그래서 저는 저를 민중가요 작곡가 윤민석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한편으로는 영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워요.
-어떤 게 부담스러운가요.
=처음에 가졌던 민중가요 작곡가로서의 삶이라는 기준에 저는 훨씬 못 미치니까요. 노래와 삶이 일치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죠.
-사람들은 윤민석의 노래를 들으면서 용기와 위로를 얻기도 하고 정서적으로 동해서 울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은 음악을 하면서 행복하다 그런 적이 없나요.
=저도 행복하다고 대답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답답하긴 해요. 제가 행복하다고 느낀 건 음악으로 혁명에 복무할 수 있어서였습니다. 그래도 이 재주가 있다는 게 행복했죠. 음악 그 자체만으로 행복했던 기억은 많지 않은데 어쩌면 행복했음에도 제가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 나는 즐거우면 안 됐고 행복하면 안 됐어요. 내가 즐겁거나 행복하면 누군가에게 그만큼 미안하고 죄스러웠습니다. 눈을 뜨면 누가 분신했다는 얘기, 파업하다가 죽었다는 얘기, 이런 얘기들이 일상이었으니까요.
혁명가의 결기와 예술가의 쓸쓸함이 교차하는 광경이 욱신거리는 통증처럼 다가왔다. 나도 함께 돈을 냈어야 하는 자리에서 그가 독박 쓰듯 다 지불해서 불편하고 미안한 느낌.
-혁명가적 삶을 여러 번 언급했어요. 생경하기도 하고 바늘처럼 찔리기도 하고 그런 느낌입니다.
=운동권에 뛰어들고 나서 저는 한 번도 혁명가 말고 딴것이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실천에서는 김남주 시인이, 정서적인 면에서는 문익환 목사님이 제 롤모델인데요. 제가 말씀드린 혁명가라는 것은 선도적인 싸움을 진행하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통일, 민중 그런 가치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서슴없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던질 수 있도록 늘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조금 화석화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요. 지금은 사람의 삶이라는 게 직렬모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모드가 있다는 쪽입니다. 누구의 아빠, 누구의 친구, 소비자,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삶 여러 가지 모드가 있는데 이 모드들이 삶의 시기마다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다는 거죠. 매일 43명의 사람들이 자살하는 천민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저 밑으로 떨어지는 양심이라는 것의 우선순위를 조금씩 조금씩 높여나가는 훈련을 하는 걸 저는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으면 돈 부치고 말았을 텐데”염치라는 것도 그 양심이라는 것에 중요하게 포함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윤민석 음악회에 참석한 이들은 그런 염치에 예민한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았음에도 스스로의 부채감으로 국밥집에 온 변호사처럼 자발적으로 빚을 갚으러 온 사람들.
윤민석 음악회는 두 번 열렸다. 한 번은 1995년 그가 교도소에 있을 때, 또 한 번은 2012년에. 두 음악회는 모두 본인 표현에 따르면 ‘윤민석을 살린 음악회’였다.
-첫 번째 윤민석 음악회를 하겠다고 후배들이 찾아왔을 때 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네, 그랬죠. ‘형은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러는데 부담스럽더라고요. 감옥 안에서 죽을 만큼 힘든 때였습니다. 운동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산에 들어가서 살자 그럴 만큼요. 그런데 나와 상관없이 밖에서는 ‘민중음악 작곡가’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습니다. 결국 저 없이 이틀 동안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교도소에서 보안과장 입회하에 음악회 비디오를 봤는데 보는 내내 펑펑 울었습니다. 벼랑에서 떨어지다가 벼랑에 솟아 있는 나무뿌리를 잡고 겨우 살아난 느낌이었어요. 윤민석이라는, 내가 부담스럽고 불편해하는 그 이름과 노래들을 아껴서 불러주고 기억하는 게 그렇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그것의 핵심은 날 잊지 않고 있다는 느낌인 건가요.
=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몸을 멈추게 할 만큼 강력했습니다.
-2012년, 그러니까 재작년에 열렸던 윤민석 음악회는 서사도 많고 굉장히 기념비적인 음악회였습니다. 윤민석도 없는 음악회에 왜 그렇게 수천 명이 몰려왔을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만약 제 입장이었다면 돈으로 그냥 한 번 송금하고 말았을 수도 있는데 그 자리에 그렇게 왔다는 게 이해를 못하겠더라고요.
-아내의 병간호 때문에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불편한 게 있나요.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음악회를 소개하는 기사 제목도 ‘우린 윤민석에게 빚이 있잖아’였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서 한 거니까 사람들이 빚이라고 생각할 건 없다고 본 거죠. 제가 먼저 가신 열사들이나 문익환 목사님, 한열이나 종철이에게 무지막지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거와 비슷한 맥락의 부채감이라고 짐작하지만, 전 제가 그런 부채감을 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본인은 민폐라고 표현했지만 다르게 보면 사람들 마음속에 분출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윤민석이란 이름의 떡이 맞춤하게 그 자리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죠. 아무나 떡이 될 수는 없는 거지만.
=맞아요. 그 표현이 맞는 거 같아요.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에 대한 일종의 부채감 같은 게 제 삶이나 제 일이 계기가 돼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 그래도 음악회에 참여하고 저를 후원해준 분들에 대한 부채감이나 불편함은 여전합니다.
아내 목소리 담은 음반 발매 예정-어떤 부채감이고 불편함인가요.
=반복해서 얘기했던 것처럼, 제 무능력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아내에게 해볼 수 있는 치료를 다 못 했을 거고 그러면 기적처럼 퇴원할 수도 없었겠죠. 고맙기도 한 동시에 미안하기도 합니다. 자꾸만 누군가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는 거 같아서요. 또 윤민석이라는 이미지와 그에 대한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요.
금방 못 알아들을 얘기가 하나도 없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수도자의 검박하게 일관된 삶을 초라하다고 흉보지 않는 것은, 그러면서 어떤 식으로든 기꺼이 물질과 마음을 포개는 것은 그들의 삶이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야 할 길인데 우리가 미처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부끄러움과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윤민석의 삶에서 우리가 부채감을 느끼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인지 모른다.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을 털어내기 위해서 녹음했다는 아내 양윤경씨의 음반에 대해 물었다.
-언제 녹음한 건가요.
=한 두어 달 전에요. 녹음실 가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아내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아내가 재발하고 병원에 있으면서 제일 가슴 아팠던 게 명색이 남편이 작곡가인데 아내의 음반 하나를 만들어주지 못한 거였거든요. 그래서 그때 기도했죠. 조금만 살려주시고,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고, 여건만 되게 해주시면 아내의 목소리를 담은 음반을 꼭 좀 내고 싶다고요.
-결국 이루셨군요. 마음에 드나요.
=네. 아내가 예전보다 힘도 달리고 호흡도 쉽지 않았지만 잘 나왔습니다. 풀오케스트라가 동원된 클래식 반주예요. 얼마 전 믹싱을 끝내고 작업한 걸 아내에게 들려줬더니 아내가 울면서 그러더군요. “당신이 결혼하면서 15년 만에 나를 가수로 만들어줬네. 고마워.” 한참 울었습니다. 이번 음반의 콘셉트는 아가들을 위한 노래예요. ‘여러분의 후원으로 윤민석도 살았고 아내도 살아서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음반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아가들을 축복하고 위로하고 싶습니다. 자장가도 있으니까 제 아내 목소리로 아이들을 재워주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여러분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이 기적 같은 노래들을 드립니다.’ 꼭 그렇게 전하고 싶습니다.
제작비 문제로 3월 발매 계획이 늦춰질지 모른다는 이 행복하고 설레는 음반의 제일 첫 번째 선(先)구매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새싹처럼 움트는 느낌. 들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아내 양윤경이 불렀다는 자장가의 톤으로 윤민석을 대신해 부부에게, 나흘 밤 나흘 낮을 열에 들떠 신음하는 아내 곁에서 시인이 했다는 기원을 보낸다. 다독이듯.
“따뜻한 봄이 오거든/ 나뭇가지 가지마다 꽃이 피거든/ 아내여 아내 아내, 어여쁜 아내/ 꿈속에서 깨어나듯 피어나거라”(민영, ‘아내를 위한 자장가’)
부채감을 잊지 않고 살아내는 그것만으로도 삶은, 위대하고 충분하다. 그러면 결국 꿈속에서 깨어나듯 활짝 피어난다. 윤민석도 양윤경도우리도.
이명수 심리기획자, 녹취 나해리 인턴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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