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좀체 질문을 던지는 법이 없었다. 어릴 적 우리 삼남매가 숨을 꼴깍꼴깍 삼켜가며 (V)라는 텔레비전 외화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아버지는 권투 중계 시간이 되었다며 채널을 돌려버리곤 했다. 딴딴다 딴따따다단~으로 시작되는 권투 중계 시그널송을 나는 아직도 저주한다. “갈치보다야 고등어가 낫지.” 아버지의 한마디에 밥상에 오르는 생선이 바뀌었다. 우리 삼남매는 갈치를 훨씬 좋아했다. “가시나들이 늦게 싸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엄포에 매일 발을 동동 구르며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우리 경내는 운동화가 해질 때까지 신는 알뜰한 아이”라는 규정이 떨어지자 ‘사실은 나도 새 신이 신고 싶어요’라는 속내를 꺼내지도 못했다. 해진 운동화가 부끄러웠지만, 아버지의 착각을 바로잡을 용기가 그 시절 내겐 없었다. 그만큼 아버지의 독재는 공고해졌다.
질문을 몰랐던 아버지의 추억삼남매의 머리가 커가면서, 엄마의 배포와 경제력이 커지면서 아버지의 권력은 도전받기 시작했다. 이제 노쇠한 아버지는 가족의 물적·정서적 유대망에서 내쳐지지 않기 위해 우리의 반응을 살피고 판단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이라는 게 어설프고 단조롭기 그지없지만, 그 덕분에 아버지는 가족 성원권을 인정받았다. 사회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과정도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지난 1년을 돌이켜보면 인권과 민주주의의 심각한 후퇴를 절감하게 된다. ‘영정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노동자들과 장애인의 아픔은 잇단 죽음을 통해서야 겨우 관심을 얻었다. 소박한 삶의 자리조차 빼앗긴 사람들의 절규, 시궁창에 뒹구는 대선 공약들, 더 빡세게 일해도 갈수록 쪼그라드는 살림살이, 지켜지지 않는 공허한 법률과 ‘법대로!’라는 으름장의 뻔뻔한 공존까지 후퇴의 증거들은 즐비하다. 게다가 이 나라 정부와 여당은 더 이상 시민들의 의견을 묻는 수고로움조차 행하지 않는다. 소리·소문도 없이 개정된 청소년활동진흥법은 모든 이동·숙박형 청소년 활동에 사실상의 허가제를 도입해 여성가족부에 민간의 청소년 활동을 쥐락펴락할 통제권을 쥐어줬다. 안전 확보가 이유라면 시설의 안전 상태와 난립한 사설 영리업체들을 감독해야 하건만, 단지 주최 단체의 행적만 뒤질 셈이다. 수서발 KTX가 철도 민영화의 수순이라는 합리적 의심에도 그저 정부를 믿어보라는 강변과 파업 참가자 전원 직위해제라는 겁박만이 돌아온다. 세계인권선언을 기념하는 지난 12월10일,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이즈 감염인들은 환자가 어이없이 죽어나간 요양시설의 개혁 방안을 논의할 공청회 개최를 요구했다. 이튿날 국가에너지기본계획 공청회 자리에서 신규 핵발전소와 송전탑 부지 주민들은 사지가 들려 끌려나왔다. 고작 공청회마저 온몸을 던져 요구해야 하는 시대라니! 시민을 향한 설득은커녕 듣는 시늉마저 사라졌다.
저들은 질문해야 할 이유가 없다간혹 질문을 던지는 경우도 횡포를 정당화할 명분 수집용이다. ‘밀양 송전탑 건설에 찬성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건설 부지에서 먼 곳의 주민들에게 던져졌다. 부러 엉뚱한 번지수를 찾았다. ‘우리 동네에 고압 송전탑이 세워지면 찬성하겠느냐’는 질문에는 달리 응답했을 이들 다수가 찬성을 표했다. ‘학교를 그만둔 걸 후회하십니까?’ 학교 중단이 미성숙한 결정이란 암시를 얻어내고 공교육의 틀 안으로 청소년들을 다시 집어넣으려는 질문이다. 학교 밖의 삶이 황량하지 않으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는 묻지 않는다. ‘엄청난 경제 손실과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한 철도노조의 불법 파업에 정부가 엄정 대처해야 할까요?’ 조만간 이 익숙하고도 구린 질문이 던져질 것이다. 질문들이 그 자체로 폭력이고, 이웃을 적으로 갈라놓는다.
생각해보면 저들은 질문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질문은 애초 도전하는 자들의 몫이었다. 질문할 기회, 응답하도록 강제할 기회, 잘못 던져진 질문을 고쳐쓸 기회를 만드는 일부터 우린 또다시 우직하게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닥쳐올 새해도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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