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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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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의 든든한 ‘빽’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 광주트라우마센터장
‘상처 입은 치유자’ 강용주
등록 2013-12-20 17:34 수정 2020-05-03 04:27
탁기형

탁기형

지난번 자신의 인터뷰 기사를 본 서천석 원장이 내가 오래 기억하면 좋을 짧은 소감을 보내주었다. “제가 한 말보다 더 낫게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들었던 것일까. 어떻게 들어야 하는 것일까. 연이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또 다른 이를 만나러 가면서 내내 그 말을 생각했다. 그렇게 귀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다.

섬세한 바리스타, 전향제도 무너뜨린 장기수

어떤 이가 있다. 50대 초반의 사내다. 요리 실력이 남다르고 감각적인 수염과 화려한 양말이 딱인 사람이다. 늘 유쾌하고 에너지가 넘쳐난다. ‘비트코인’ 같은 새로운 개념들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고 그에 걸맞게 생각과 행동 간의 거리도 짧다. 커피 내리는 솜씨가 유난히 섬세하고 다정하기로 소문난 바리스타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또 어떤 이가 있다. 1980년 5·18 때 마지막 날까지 총을 들고 맞선 고3의 시민군이었다. 의대 재학 때 조작된 간첩사건에 연루돼 35일간 고문을 당했고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전향서에 사인만 하면 사면될 수 있었음에도 내 자유의지를 침해받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14년 동안 독방에 갇혀 지냈다. 그 기간 동안 300일 넘는 단식투쟁을 벌였고 우리나라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결국 사상전향제도를 무너뜨렸다. 출소 뒤 학교로 돌아가 졸업했고, 40대 중반에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이번엔 어떤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가.

짐작처럼 둘은 한 사람이다. 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특별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이런 모습에서 저런 모습으로 변한 게 아니라 강용주라는 사람이 본래 그렇다. 다른 모습들의 공통점은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이다.

의외로 몸이 아니라 자기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삶은 그리 많지 않다. 외부 환경 탓이기도 하고 스스로를 옥죄는 자기 검열 때문이기도 하다. 말은 옳다고 느끼지만, 막상 실행의 문턱에서는 ‘몸 아닌 마음 쪽’의 진실성과 효용성에 대해 걱정하고 의심한다. 진짜 마음 편한 대로 사는 게 가능은 한 것일까. 그게 가장 합리적인 의사결정인 건 맞는가. 가능하고 맞다. 강용주라는 사람이 그것을 증거한다.

강용주는 서울 면목동에서 통증 치료를 주로 하는 개인 병원을 개원하고 있다. 그곳에 가서 묻고 들었다.

-요즘 일과가 어떠세요.

=매주 수요일은 광주트라우마센터에 가고 나머지 날들은 서울에서 일합니다. 병원에 지장이 많죠. 제가 뭐 세계적인 명의도 아니고 감기 환자 보는 의사인데 동네 분들이 왔다가 의사가 없으면 그다음부터 우리 병원에 안 오죠. 일주일에 한 번씩 광주를 다녀오는 거, 병원과 병행하는 거 쉽지 않지만 괜찮습니다.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 외엔 고문생존자들이 만든 재단 ‘진실의 힘’ 관련 일을 주로 하는데요, 그다음엔 뭘 더 하려고 해도 시간이 없어요. (웃음)

-대외적으론 광주트라우마센터장이 주요 직책인데 실제론 다른 일들도 많이 하시는군요.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공적으로도 무척 중요하죠.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국가폭력 생존자들의 치유센터이거든요. 국가폭력 생존자들을 치유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심리치유하곤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선 국가폭력에 관한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 치료의 전문 역량 자체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어떤 게 가장 어려운가요.

=전문성을 강화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광주트라우마센터에 자율성과 독립성이 없다는 겁니다. 트라우마센터는 현재 광주시 산하 단기계약직들이 모여 있는 집단의 성격이라서 예산, 인사권, 사업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하나도 없습니다. 광주트라우마센터 이름으로는 외부로 공문 하나 보낼 수 없어요.

치유가 아니라 치유적 힘을 발견하는 것

그는 이 대목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흥분하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센터의 자율성과 독립성에 대한 그의 소망과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 듯했다.

-국가폭력 피해자 선생님들은 센터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트라우마센터가 생겨서 너무 좋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내 가슴속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전부 할 수 있었다, 그것으로 됐다, 그러면서 이러세요. ‘나 이제 든든한 빽이 생겼다.’

듣는 마음까지 든든해지는 느낌.

-‘광주트라우마센터는 국가폭력 생존자 선생님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시하는 곳이다’라는 정의가 인상 깊더군요.

=우리 센터의 기본은 그거죠. 저희들은 그분들을 치유해주는 게 아니라 그분들의 내면에 있는 치유적 힘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존재입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고문생존자들, 국가폭력 생존자들의 내면적 치유에 대해 너무 소홀했습니다. 치유를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게 이해와 공감인 거고 그러려면 서로 간에 신뢰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뢰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거든요.

-국가폭력 피해자라 하지 않고 생존자라고 표현하시네요.

=피해자는 국가로부터 일방적으로 당한 사람이지만 생존자는 국가의 폭력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피해자는 객체지만 생존자는 주체인 거고, 그 주체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힘을 표현하기 위해서 생존자라는 표현을 쓰는 거죠.

-본인도 그런 국가폭력 생존자의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렇죠. 저는 5·18을 겪고 나서도 생존자였고 감옥에서 비전향 싸움을 할 때도 그다음 과정에서도 생존자였다고 생각합니다. ‘5·18을 겪었으니 너도 똑같은 피해자일 거 아니냐?’ 물론 그렇죠. 80년 5월을 어떻게 잊어요. 잊을 수가 없는 거죠. 죽어야 해방이 되죠. 그렇지만 5·18에 갇혀서, 거기에 가위눌려서 내 삶 자체나 내 존재 자체가 망가지진 않은 거죠. 저는 감옥에 있으면서 어찌됐든 싸우고 도전하고 성취해온 삶이 있었잖아요. 한편으론 그때의 트라우마가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삶이 고통스럽진 않다는 거죠. 출소 뒤 대학을 다시 들어가고 졸업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도 많았고요. 저 같은 경우는 장기수들 중에서도 사회적 복귀를 성공적으로 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지요.

-그건 결과론적 얘기일 테고요. 제3자가 보기엔 강 원장의 이력 속엔 따스한 봄날의 기억이 별로 없었을 듯싶은데요.

=따뜻한 날이라… 저는 삶 그 자체에 대해 엄청 감사하다 이런 것보다 그냥 사람 관계에서 늘 좋았던 거 같아요. 특별히 어디에서 그랬다기보다 어디에 있든 그냥 좋았던 거 같아요.

밥 굶고 문 차서 지켜낸 이름

그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대답처럼 느껴졌다. 겨울인 것처럼 내가 다시 물었다.

-가장 추웠던 날은 있나요.

=있죠. 가장 추웠던 건 1980년 마지막 항쟁 날의 도청도 아니고 안기부에서 고문당할 때도 아니에요. 감옥에 들어가서 재판할 때 아무도 변호를 안 해주는데 그때가 추웠죠. 그리고 88년 12월에 5공 청산 차원에서 양심수 석방을 할 때 협상 테이블에 석방 대상자를 올리는데 누구도 내 이름을 넣어주지 않았습니다. 비전향이기도 했지만 민주화운동 했던 다른 이들에 비해서 나는 이름 없는 수인이고 다른 사람은 다 이름 있는 수인이었거든요.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은 거죠. 그때 내가 결심을 했죠. ‘그래, 내 힘으로 목숨 걸고 싸워서 내가 나간다.’ 그러면서 24일인가 28일 동안 굶기 시작했죠. 그럴 때가 추운 거죠.

얼마나 추웠을까. 그의 가슴속에 있던 고드름 하나가 내 정수리에 떨어지는 느낌이라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꿔 앉았다.

-아주 뼈저린 기억인 모양입니다.

=위아래 앞뒤 좌우가 꽉 막혀 있는 쇠로 만든 관에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관 뚜껑을 누가 열어줄 줄 알았죠. 근데 ‘야, 저건 관이래’ 이러고 그냥 간 거죠. 그래서 내가 안에서 ‘여기 이 관 안에 사람 있어요!’ 하고 발로 차서 그 관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농담으로 내가 그래요. 나, 강용주 이름 석 자는 한 획마다 내가 밥 굶고 문 차고 악써서 새겨낸 이름이라고요.

-뻔한 질문인 걸 알면서도 정말 궁금한 게 어떻게 14년을 전향서 쓰지 않고 버텼느냐는 거죠. 사인만 하면 금방 나올 수 있었는데도요.

=그때 대전교도소에 암에 걸린 장기수 선생님이 계셨는데 전향을 안 했다고 치료를 안 해줍디다. 결국 치료 한 번 받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니까 죽은 사람의 손에 인주를 묻혀 전향서에 지장을 찍은 다음에 그걸 흔들면서 ‘이 빨갱이 새끼들아, 너희들은 전향 안 하고 살아서 못 나가’ 그랬습니다. 80년 5월이라든가 86년의 감옥이란 상황은 자기 존재 전체를 걸고 싸워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거죠. 그런 야만적인 사회에서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 그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우리가, 인간이 그런 상황에 내몰리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놓고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물어야 하는 거죠.

설명이 명확해서 왜 잘못된 질문인지 잘 알아들었지만 궁금증이 가시지 않아 또 물었다.

-어떤 힘으로 버티셨어요.

=제가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인간은 상황적 존재라고요. 상황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데 운명이 던져준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 거죠. 저는 ‘우연한 개인’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그 우연한 개인이 상황적 존재로 놓였을 때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따라서 결정을 하는 거라 생각해요. 그 목소리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안 들릴 수도 있지만, 안 들리더라도 그 목소리가 없는 건 아니죠. 양심, 자기 존재, 자존심이라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불편함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그때 상황적 존재로 놓인 우연한 개인인 내가, 나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 어느 게 제일 편하냐는 거죠. 그 마음이 편한 쪽으로 결정을 하는 거죠. 되돌아보니까, 내 삶의 고비고비마다에서 몸은 불편해도 마음이 편한 결정을 했는데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빚진 거 없다, 홀가분

몸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편한 쪽으로 가는 게 진리라는 걸 체험 삶의 현장처럼 알려줘 고맙습니다, 인사라도 하고 싶은 심정. 누군가 내게 심리기획자라는 게 뭐냐고 물으면 ‘사람에겐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을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처지에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비슷한 상황이 되면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할까요.

=예를 들어 지금 보안관찰법으로 나를 기소해서 감옥에 보낸다면 그건 다시 나를 링 위로 불러서 전사로서 싸우란 거잖아요? 그럼 얼마든지 싸워줄 각오가 있습니다. 보안관찰법이든 뭐든 국가권력이 나를 링 위로 불러낸다면 얼마든지 싸워주겠다. 그렇지만 내가 일부러 만들어서 링 위엔 안 올라가겠다는 거죠.

-세군요. 일상적으로도 두려운 게 전혀 없나요.

=두려운 거 그것하곤 상관없이 겁이 많아요. 가령 바이킹을 무서워서 못 타고, 높은 데 올라가지 못하고, 산 위에 올라가면 바위에 이렇게 서서 있지도 못하고, 밤에 혼자 집에서 자고 있으면 갑자기 귀신 나올까봐 무섭고 그래요.

목욕탕에 가서 등이라도 한번 밀어주고 싶을 만큼 정이 가는 말이라서 슬며시 웃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편한 쪽의 선택을 해서 감옥에 오래 있었던 건데 혹시 후회 같은 건 없나요.

=없어요. 물론 감옥 산다는 게 힘들고 어렵긴 하지만 한번 사는 삶에서는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감옥에서의 삶이 남들처럼 트라우마 입고 그런 게 아니라 결국 이기고 성취하고 그 성취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되었으니까요. 감옥 나올 때 생각해보니 ‘아, 나는 세상에서 할 일 다했다. 이제 세상에 빚진 거 없다. 세상이 나에게 뭘 하라고 당위적으로 요구하고 그럴 거 없다’ 홀가분하더라고요.

그냥 상처 입은 대로 사는 거지

아직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는지 세상에 대해 그렇게 홀가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편한 쪽으로 가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지당한 교훈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물었다.

-세상에 대해 다정해지셨나봅니다.

=아니요. 여전히 나한테 세상은 낯섭니다. 이게 내 세계란 느낌보단 당신들의 세계인 느낌이 강한 거죠. 이 사회에서 내가 이렇게 살긴 하지만 내 내면에선 근본적으로 ‘나는 이방인이고 나그네’란 생각이 들어요. 심리적으로.

-뭐 때문에 그런가요.

=세상과 아직 화해가 덜 돼서 그러지 않을까요? 아직도 내 내면에는 80년 5월, 85년 남산 안기부, 그다음에 감옥 그런 게 있는 거죠. 나를 몹시 춥게 했던 그 기억들과 관련된 사람이나 단체들이 떠오르면 지금도 자꾸 똥침을 놓게 돼요. 세상과 불화하는 거죠.

-상처의 후유증인가요.

=그렇죠. 교통사고를 당해서 큰 부상을 입었는데 그 상처를 잘 꿰매고 재활하고 그런다고 상처 자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근데 그 시절 그 상처 때문에 내 얼굴에 상처 생겼네 이러면서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이러진 않는 거죠. 그냥 상처 입은 대로 사는 거지.

-자기 상처를 직면하고 인정해서 그 바탕 위에서 자기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생각납니다. 광주트라우마센터장 일도 그렇고 고문피해자 치유모임인 ‘진실의 힘’ 일도 그렇고요.

=남들이 볼 때는 아주 공적이고 그럴지 몰라도 저는 제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따라 결정하는 거고 그 결정은 나 편하자고 하는 겁니다. 가장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기 편한 선택을 하는 거죠. 그리고 또 한 측면에선 제가 무척 당위적인 인간이에요. 그냥 해야 되는 일이면 하는 거예요. 당위적이어서 필요한 일이다, 근데 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해야 되겠구나 그렇게 결정을 하면 하는 거죠.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그러는 게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을, 노래 잘하는 가수가 음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듯 잘 어르는 듯해서 든든하고 흐뭇한 느낌. 그에게 이런 시 한 구절을 한 눈 찡긋하며 전해주고 싶어졌다.

“마음을 먹는다는 말/ 기막힌 말이에요/ 마음을 어쨌다구요?/ 마음을 먹어요!/ 그래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거예요”

-정현종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중

외형적 따라쟁이와는 별개로 강용주처럼 몸이 아니라 마음이 편한 쪽으로 갈 수 있으면, 삶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명수 심리기획자, 녹취 강선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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