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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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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미스터 리

등록 2013-12-13 14:11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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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영화인. 시나리오를 써보자. 하지만 아무 아이템이나 쓸 순 없지. 좀 있어 보이게 ‘국가권력’과 ‘감시’ 어때. 하지만 상업적 측면도 고려해야 착한 감독이렷다. ‘국가권력’이 조직적으로 주인공을 누명 씌우고 감시하는 이야기 어때. 그리고 주인공은 그러한 조직적 거대세력에 맞서서 도주하고 끝내 반격하고. 대박 예감일세. 얼른 써보자.

FBI처럼 행동하면, 코미디 장르

아이템을 잡고 나니 귀감으로 삼을 만한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토니 스콧 감독의 1998년작 . 억울하게 정치 암살 사건에 말려든 한 변호사가 국가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게 되고, 감시망을 피해 달아나면서 누명을 벗고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윌 스미스라는 신예와 진 해크먼이라는 중견 배우의 앙상블도 볼거리였지만, 토니 스콧 감독만의 휘갈기는 카메라 기법과 빠른 전개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독특한 화법이 절정에 이른 작품이다. 특히 정보기관 요원들이 첨단장비를 이용해서 주인공을 조직적으로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서, 인공위성까지 동원해서 날고 뛰는 주인공을 추적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한마디로 주인공만큼이나 ‘적’이 멋있다.

난 실제로 를 모태로 해서 이야기를 썼고, 그것을 들고 모 영화사에 찾아갔다. 매우 당당하게. 걸작을 모태로 삼았으니, 재미없다고는 안 하겠지. 하지만 여기서 반전. 내가 가져간 이야기는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속된 말로, 까였다.

왜일까. 도대체 왜일까. 영화사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한 것이었다. 너의 시나리오에서 묘사하는 정보기관 모습이 전혀 개연적이지 않고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정보기관은 이렇게 과학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이 시나리오대로 만들어진 영화는 관객의 조롱 속에서 흥행 쪽박 차리란 것이 영화사 쪽의 분석(행여 미리 말해두건대, 이 영화사는 한국 굴지의 영화사여서 내공은 신뢰하셔도 좋다).

듣고 보니 그렇다. 미국 영화에서 정보기관들은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기상천외한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도 개연적이다. 그렇다보니 은폐와 조작 스캔들이 일어나도 일단 스케일이 크고, 또 거기엔 마르지 않는 신비가 있다. 영화의 소재가 될 만한 음모와 미스터리도 무진장이다. 실제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 국가안보국(NSA), 국가정찰국(NRO) 등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만약 한국 영화에서 정보요원들이 선글라스를 끼고 나와서, 알아듣지도 못할 교신용어와 전대미문의 장비들을 써가며 무언가 조직적인 프로토콜을 따르면서 움직인다고 상상해보라. 관객은 일단 빵 터질 것이다. 코미디인가, 감독이 허세 부리네, 라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보기관은 그렇게 조직적이거나 전문적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폐와 조작 스캔들? 가끔씩 있긴 하다. 단박에 걸릴 정도로 조잡해서 그렇지. 스케일도 작아도 너무 작아서 지적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라 그렇지. 옛날에는 지나가는 사람 봉고차로 태워가서 거짓 진술서 받아내던 것, 요즘에는 골방에 앉아서 유머 게시판에 댓글 달고 앉아 있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음모며, 무슨 미스터리가 있겠는가.

국정원을 고소해야 하나

할리우드 영화가 선거 개입을 다룬다면 그것은 미사일 공격, 생화학 공격, 레이저 공격이 될 수 있겠다. 하지만 한국 영화가 선거 개입을 다룬다면 그것은 인터넷 댓글 공격이다. 아마도 같은 영화는 한국에서 영영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멋있는 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코미디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선거 개입해서 정권을 지키자!”라고 외치더니 오피스텔에 쭈그려 앉아서 댓글을 달고 있는 캐릭터는, 본격 액션 스릴러 장르보다는 코미디 장르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미스터리 결핍, 전문성 결여 덕분에 시나리오도 까이고, 또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나로서는, 국정원을 고소해야 하나? (다행히 난 혼외 자식이 없다.)

김곡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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