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일
하루 세끼 먹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 삶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 이웃은 무엇을 먹는지에도 아무런 관심조차 갖지 않게 되었지요. 도시에서는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이 먹는 음식이 단지 가격 차이만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게 됐습니다. 도시의 삶을 벗어나 조용한 농촌 생활을 꿈꾸며 이주했다가 저소득층을 위한 먹거리 정의와 지역 공동체 만들기라는 깨달음에 이른 농사꾼 부부를 만나봤습니다. 전북 장수군 계남면 호덕리 하늘소 마을(장수하늘소 마을)에 살고 있는 김성래(45)·박진희(41) 부부입니다. 전북 장수군에 도착해서도 집을 찾지 못해 40여 분을 헤매다 겨우 만난 부부는 맛있는 강냉이를 내밀며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활달한 박진희씨가 거의 이야기하고 과묵한 남편은 가끔씩 몇 마디 거들었습니다.
“저소득층에게 유기농산물 줘야 한다”-언제 귀농을 하셨어요.=2009년 4월에요. 그 무렵 아이들에게 뭘 물려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 끝에 고등학교까지는 시골에서 자라게 하자는 생각에 미쳤고, 정착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장수하늘소 마을은 2003년에 귀농이주자를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고, 아이들이 가장 많은 마을이었죠. 게다가 남자아이가 많아서 딸이 셋인 우리 집이라면 무조건 환영할 거라는 귀띔을 받고 이 마을에 오게 됐어요.
-정착하면서 어떤 일을 했나요.=전업농으로 살기는 쉽지 않아요. 경제적 자립이 어려워서 부부 중 한 사람은 다른 일거리를 알아봐야 하죠. 우리 마을은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으면서 ‘꾸러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회원제 다품종 농산물 판매사업을 시작한 마을인데요. 남편도 그 일을 했어요. 저는 환경운동단체에서 일하고 있어 1년 뒤에야 내려왔는데요. 꾸러미 보내기 일을 도와주다보니 여러 문제의식이 막 튀어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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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러미를 받는 분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윤택하거나 유기농을 먹어야 한다는 투철한 의식을 가진 분들인 거예요. 왜 그럴까 하는 고민이 생긴 거죠. 우리 사회가 언제부턴가 먹거리에서 소득 격차가 생기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고민 끝에 의도적으로 저소득층에게 유기농산물을 줘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부자들은 관행농산물을 먹든 유기농산물을 먹든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인데, 저소득층은 그렇지 않아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좀더 안전하고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먹거리 양극화가 건강 양극화로, 소득 양극화로 악순환이 되는 거죠. 건강과 삶의 질을 포함한 격차의 문제를 해소하려면 더 좋은 음식을 의도적으로 공급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게 유기농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저소득층에게는 아직도 질보다는 양이 문제가 아닐까요.=양도 중요하죠. 그러나 남아서 보내드리는 게 아니라 똑같은 걸 드리는 것, 존중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좋은 먹거리를 먹고, 삶의 에너지를 얻고, 더 건강해지고, 희망을 버리지 않게 되는 것, 그래야 질적인 면에서 행복한 삶의 평균 정도에는 이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죠.
-문제의식을 실천으로 어떻게 바꾸게 된 거죠.=서울 지역 공부방 아이들에게 친환경 급식을 해보거나 소비자가 양파즙을 구매하면 일정액을 후원해주는 사업을 했죠. 이 아이디어로 2012년에 ‘개미스폰서 프로젝트’를 제안했어요. 공감하는 분들이 후원금을 모아 주는 펀딩 사업이었죠. 뜻밖에도 후원금을 성공적으로 모으게 됐어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소셜벤처 경연대회에 나갔죠. 사실 목표는 거기에 사회적 경제를 생각하는 분이 많이 오니까 먹거리 정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만으로 나갔는데 상을 받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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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얻은 박진희씨는 ‘푸드앤저스티스 지니스테이블’이라는 사회적 기업을 창립했습니다.
-회사 이름이 너무 길어요.=아직 ‘먹거리 정의’(Food Justice)라는 말이 익숙지 않아서. ‘푸드앤저스티스’를 뺄 수 없었어요. 사람들이 회사 이름을 다 못 외워서 뭐라고 그랬지, 이래요. (웃음) 먹거리 정의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아, 뭔지 알겠다’ 할 때까지는 붙여두려고요.
-지니스테이블은요?=소셜벤처 경연대회에 나갔을 때 멘토가 제 이름을 따서 ‘지니스테이블’로 하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싫었어요. 가만 생각해보니까 소득 불평등 계수를 ‘지니계수’라고 하죠,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램프 요정도 지니잖아요? 이 사업은 누군가의 후원이 늘 필요한 방식이거든요. 누군가는 요정이 되고 누군가는 요정을 필요로 하면서 소득 불평등을 완화해보자는 의미가 된 거죠.
-개미스폰서 프로젝트로 받은 후원금은 어떻게 사용했어요.=270만원의 후원금이 들어왔어요. 그걸로 13곳의 지역 공부방과 장애인 자립공동체에 꾸러미 농산물을 보내주었어요. 일정액 이상 후원해준 분들에게는 감자를 보냈는데, 꾸러미에 감자까지 보내느라 사실 수익보다는 적자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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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달라요. 저희가 식생활 교육을 한 아이들은 누가 농사지은 건지 알기 때문에 더욱 맛있게 먹더라고요. 정말 기뻤던 건 시설에 있다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장애인의 반응인데요. 원하지 않는 시간에 원하지 않는 음식을 지겹도록 먹다가 본인이 직접 조리할 수 있는 재료를 받아서 아주 기뻤다고 말씀해주신 거예요. 사실 이런 분들은 도시락 지원을 받지만, 늘 조리된 상태로 받거나 가공된 걸 받잖아요. 푸드뱅크는 좋은 취지지만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이죠. 그런데 직접 요리할 수 있거나 누군가 요리를 함께 해줄 수 있는 안전한 식품을 받는 기쁨을 이야기해주실 때 정말 기뻐요.
-저소득층에게도 요리하는 즐거움을 준다는 생각이 신선하네요.=‘일촌공동체 송파센터’라는 비영리단체와 같이 활동하고 있는데, 요리를 배우는 청소년들이 있어요. 그 청소년들 집에 요리사의 꿈을 키우라며 식재료를 보내주는 건데, 반응이 좋아요. 선물도 받았어요. 물론 이렇게 음식을 보낼 때는 조리가 가능한 분이 있는지 조사해요. 그래서 그 지역을 잘 아는 단체와 함께 일해야 하죠.
“식품기업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 있어야”-결국 ‘음식 정의’라는 것은 ‘존중’이라는 건가요.=많이 줘서 배부르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음식으로 배부르게 한다는 거죠. 더 나아가 누가 보내서 어떻게 받았는지 모르게 하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먹거리를 주면서 이 사람이 가난해서 어디로부터 지원받고 있는 사람임을 주변에서 알도록 해야 하는지 하는 의문이 있어요. 기본적인 인권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그 해결책이 반드시 유기농일까 하는 의문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삐딱한(?)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먹거리 정의에 관해서, 선뜻 동의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요. ‘정크푸드’라고 하지만 햄버거를 동네 친구들과 똑같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오히려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절실하지 않을까요.=미국에서도 푸드 스탬프 받는 사람들이 제일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스타벅스래요. 왜냐면 그 사람도 문화를 즐기고 싶으니까요. 어떤 먹거리를 공급해줄 것인가와 더불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어요. 먹거리 문화를 획일화하거나 그것을 기업화해서 고급 문화 차원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죠. 햄버거를 좋아하는 문화가 바람직한지, 대안적 문화를 우리가 만들 수는 없는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봐야 하죠. 그런 생각으로 먹거리 교육도 같이 하고 있어요. 먹거리 정의 운동의 한편에는 식품기업의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이 있어야 해요.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나요.정용일
=다양한 저소득층 지원 방식을 찾아야 하는데, 사회적 기업을 만든다 해도 이런 사업은 전국 단위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소농 규모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도시와 농촌의 지역 간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그 안에는 유기농산물을 공급하는 농부들과 먹거리 격차를 줄이는 방법으로 농산물을 공급하겠다는 분들이 함께 결합하는 거죠. 그런 뜻에서 ‘시민야채가게’ 또는 ‘시민식당’이라는 사업도 구상 중이에요. 저소득층만을 위한 식당으로 인식되면 망하거든요. 누구나 와서 카드를 사용해서 이용하되, 저소득층은 미리 충전된 카드로 자연스럽게 똑같은 음식으로 존중받으며 식사할 수 있는 지역 커뮤니티 식당인 거죠. 그 외에 ‘서울식생활시민학교’ 활동도 하고 있는데, 도시텃밭 농장을 하면서 무말랭이 꿰기 같은 걸 가르쳐요. 스스로 먹을거리를 만들어내고 요리하는 힘, 그런 걸 익히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죠.
-유기농 자체로 수지를 맞출 수 있을까, 의문도 들어요.=생산비에선 결정적 차이가 없는데 유통 문제가 커요. 그래서 유기농산물이 저소득층에게 싸게 공급되기 위해선 사실 지금으로서는 후원이 있어야 해요. 윤리적 소비 문제로 접근해야죠.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 저변이 턱없이 얕아요. 외국에서는 개인 후원뿐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보조금이나 정부 보조금, 기업의 사회적 지원금 등이 함께 펀딩이 되고, 도시농업이나 직거래 농장을 통해 유통비를 절감해서 그걸 가능케 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아이들에겐 여기가 고향인 장수 아이들”=결국 지역 단위로 생산·유통·교육·후원이 함께 가는 건가요.
지역 공동체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면, 도시에서는 그 지역의 생산을 책임지고 대신 농촌은 그 먹거리를 책임지는 거죠. 이런 지역 커뮤니티가 저소득층에게 인권적으로 식생활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생산자는 안정적 생산을 하고 도시와 농촌이 서로 돕는 커뮤니티로 자라나도록 하고 싶어요.
-농사, 교육, 사회적 기업에 식당 구상까지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것 아녜요.=올해는 너무 처절하게 ‘내가 미쳤지’, 그러다가 조금만 눈길이 가면 내가 그걸 하고 있어서 ‘왜 내가 그걸 하고 있지?’ 그 생각을 해요. (웃음)
13년 전 남편은 호텔노동조합의 부위원장, 아내는 상위 연맹의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성실하고 추진력 있는 아내의 성품에 반해서 결혼했지만, 귀농을 결심할 때 아내는 조용히 아이 셋을 키우면서 살겠다고 했죠. 1년 늦게 품 안에 넷째아이를 갖고 내려온 아내는 타고난 성품을 어쩌지 못하고 장수하늘소 마을에서 ‘해야 할 일’들을 또 찾았습니다. 그 기질에 대해서 천부적이라고 평하는 남편의 미소 속에 아내에 대한 사랑이 담뿍 느껴집니다.
-지금 생활이 2009년에 결심했던 삶의 모습과 비슷한가요.=많이 다르죠. 단순한 삶을 생각했거든요. 지금 하려는 일 외에도 농사만으로 경제적 자립이 안 되는 것과 교육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크고, 많은 남자들이 3년 정도는 우울증과 알코올의존증을 겪는다고 해요.
김성래씨도 한때 우울감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늦둥이를 보며 세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서히 농촌에 적응했답니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에 대해선 남편이 할 얘기가 많았습니다.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하나요.=처음엔 아이들의 환경을 편하게 해주자는 뜻으로 왔는데, 와서 보니 고민되는 부분이 생겼죠. 고등학교까지는 같이 지낼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6학년이나 중학생이 되면 전북 전주로 아이들이 떠나요. 한 아이가 가면 또래 친구가 보고 싶어 다른 아이도 가고, 그러니까 지역 선생님들도 의욕이 없어지고. 그래서 아이들이 함께 지역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바꿔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그럼 또 다른 일도 하신다는 건가요.=한국마사회 재단에서 공모하는 교육사업을 신청해서 자금을 받았어요. 그걸로 우리 마을의 계남초등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과 특별활동을 해요. 근처에 장계공업고등학교가 있는데, 아이들에게 존중감을 키워주기 위해 테이블 매너 수업 같은 특별수업도 하고, 학교 주위에 숲을 꾸며주는 공모전에도 나가봤어요. 아이들이랑 플래카드를 걸고 사진·동영상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어요. 공모전에는 떨어졌지만 군청에서 학교숲을 만들어줬지요. 사실 지역 주민 입장에서는 먹거리 정의라는 말도 낯설고 저희가 귀농인, 즉 영원히 외부인일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여기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이곳이 고향이고 장수의 아이들이죠. 그런 마음으로 지역 아이들이 잘 자라도록 노력해야 되겠단 생각에서요.
“지역에서 취업하고 생활 기반 갖도록”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도 하나요.=지역 주민들 중에는 아직도 우리 마을을 ‘외지인 마을’이라 부르는 분들이 있어요. 그걸 깨기 위해 저희 스스로 ‘귀농인’이라는 말보다는 “우리는 장수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다녀요.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라고 계속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지역을 만드는 것은 또 다른 꿈이에요. 사회적 경제 네트워크도 그런 방향의 하나인데요, 지역의 자원을 연결해 지역경제 내에서 활성화시켜 청년들이 그 지역에서 취업하고 생활 기반을 갖도록 하는 거죠. 장수군청 기획실에 제안서를 보내서 벌써 한 번 모였어요. 지역 공공의 의제를 찾아서 함께할 수 있는 사업, 예를 들어 장수군 사회적 경제학교나 청소년 취업학교를 만드는 등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우리 지역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되도록 해보자는 생각을 나눴지요.
공동체가 앞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앞서 깨우친 사람, 함께하는 사람, 뒤따르는 사람, 여러 사람들이 있게 됩니다. 이러저러한 것들을 한번 해봅시다, 하면서 앞서주는 사람들에게 그 공동체가 지게 되는 빚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농사일로 까맣게 탄 두 분의 얼굴에서 저는 각자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그리고 미래 세대의 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정을 읽었습니다. 그 꿈은 함께하는 사람들로 인해 현실이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도시에 사는 분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소비의 문제는 사회적 문제이거든요. 윤리적 소비를 경험할 기회를 갖는 것이나, 유기농 같은 음식에 대한 정보 접근력의 문제 이런 것도 모두 소득과 연결돼 있고요. 이 문제를 도시와 농촌이 함께 풀어가자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장수= 정연순 변호사, 녹취 강선일 인턴기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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