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서점인 예스24는 올해 초 유료 연재소설 코너를 신설했습니다. 놀랍게도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를 제치고 23살의 여성 작가가 조회 수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라는 로맨스 소설입니다. 누적 조회 수는 28만 건을 넘었고, 한 회당 7천 회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했습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작가의 글쓰기와 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녀를 만나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정연주 작가입니다. 첫 성공이 무척 가슴 설렐 듯한 풋풋한 외모의 작가는 지난해 여름까지는 세무회계사무실에서 일하던 직장인이었습니다.
연재료만으로 살 수 있다고 하여
-은 전업작가로서 첫 작품이죠.예스24에서 지난겨울에 유료 연재 코너를 열 예정이라면서 글을 하나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그때 이 인기였어요. 담당자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기생과 왕의 러브 스토리, 망나니 왕을 기생이 개과천선시키는 이야기로 하자고 했죠. 한참 이런저런 말을 하더니 “됐죠? 파이팅!” 하고 끊으시더라고요. (웃음)
-완전히 가상의 이야기인가요.가상이긴 하지만 자료 조사를 많이 해서 소설에 반영해요. 기생에게 주어지는 옥패·목패·동패가 없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에 실제로 있었어요. 단지 1패·2패·3패라고 불렀대요. 1패는 황진이처럼 유명한 기생들이 갖고 있었어요. 몸을 팔지 않고 재주가 뛰어난 기생들이죠. 그들을 1패 기생이라 했고, 2패 기생들은 ‘은군자’라고도 하죠. 그 급부터 몸을 팔기 시작한 거죠. ‘은근짜’의 어원이 그쪽이었대요. 그걸 각색한 거죠.
-소설을 읽어봤는데, 주인공이 검무 추는 장면 같은 것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해요.제가 시각적인 표현을 좋아해요. 그런데 로맨스 소설은 감정을 주고받다보니까 그것만으로는 갈 수가 없거든요. 감성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촉각·청각 등 다양한 표현으로 문장을 세밀하게 살려서 보완하는 편이에요.
사실 소설의 내용이나 완성보다는 작가가 더 궁금했습니다. 22살에 직장을 그만두고 덜컥 전업작가로 인생을 바꾼 그 결심이요.
-전업작가를 선언하고 회사를 그만둔 게 언제예요.
지난해 6월요. 세무사사무실에 1년 가까이 다녔어요.
-어떻게 그런 용기를.지난해 창작소설 사이트인 ‘조아라’에서 장르소설 공모전을 열었는데 당선이 됐어요. 그때 담당자 말이 유료연재로 다달이 110만원을 받는 분이 계시다고, 연재료만으로 살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거예요. 솔깃했죠. 그때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바이벌 방식으로 석 달 동안 계속되는 연재 공모전에 참가한 거라 하루 종일 정신이 멍하더라고요. 낮에는 영수증 들어간 박스가 테트리스처럼 쌓이는데, 그 와중에도 밤에는 계속 소설을 썼거든요. 그런데 연재료만으로 한 달에 1천만원을 받았다는 분도 있고, 아는 작가분도 60만원 이상 받는다고 해서 ‘아, 그럼 나도 전업작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했죠.
“미장원 갈 시간 없어 비녀 꽂고 글 써” -그 외에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가 주최하는 디지털작가상도 받았던데요이라고 매듭장이와 살인에 관한 추리소설을 썼는데 턱걸이로 상을 받았어요.
한 해에 두 번이나 수상했다니, 사실 기본 역량은 이미 갖추었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막상 전업작가로의 결심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전업작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은.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시고 좀 쉬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뭐라고 못하셨어요. 엄밀히 말하면 전업작가를 허락한 게 아니라 1년 동안 휴가 기간을 주신 거죠. 제가 1년간 직장생활 하면서 안 쓰고 안 먹고 1천만원을 모았어요. 연봉이 1800만원이었는데 그 나머지 800만원 중에도 이미 500만원은 부모님께 드렸거든요. 부모님이 “다달이 100만원이라도 들어오지 못하면 다시 직장생활 해라” 하셨죠. 저금한 돈 1천만원이 떨어질 때까지만인(시한부 허락인) 거죠, 그 문제를 풀려면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배로 더 고생해야겠구나. (웃음)
-그럼 어떻게 생활했어요.직장 다닐 때도 한 달에 15만원을 안 썼을 거예요. 쓸 시간도 없었고요. 미장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와서 비녀를 꽂고 지내면서 글을 썼어요.
-저금이 바닥나기 전에 수입이 생겨서 다행이에요.솔직히 을 쓰는 동안 부모님도 백수 보는 눈빛으로 저를 보셨어요. 시골인지라 주변에 할머니들이 많잖아요. “쟤는 직장 안 나가고 아직도 쉬고 있대냐?” 친척들이 오면 “아니, 쟤 저 꼴로 컴퓨터만 붙들고 있네?”. (웃음)
작가를 소설의 세계로 이끌어낸 동기와 환경이 궁금해집니다.
-전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글쓰기와 관계없는 세무회계정보학과를 다녔어요.부모님이 인천에서 슈퍼를 했는데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집안 형편이 어려운 줄 몰랐어요. 그러다 갑자기 가계가 기울더라고요. 친척이 있는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했는데 방이 하나밖에 없었죠. 창고방을 개조해 화장실도 없는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냈어요.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현실에 대한 걱정이 앞서 작가를 하면 반드시 굶어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만 해도 소설로 돈을 벌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아예 못했어요. 어머니는 인문계 학교를 권하셨지만 제가 우겼어요. 세무회계가 취업에 제일이라고 해서 근처 대학교로. (웃음)
“10대 때 고민, 버스비와 책 대여비”-언제부터 글을 잘 쓴다고 느꼈어요.
사실 글을 읽는 건 좋아했는데 쓰는 건 안 좋아했어요. 중2 때 미술부였는데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서 공모전을 열길래 참가 신청을 한다는 게 실수로 캐릭터 부문이 아닌 시나리오 부문을 눌렀어요. 공모전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보니 그림이 아니라 글을 쓰는 거래요. 어안이 벙벙했죠. 시나리오는 써본 적도 없는데. (웃음)
-그런데도 상을 받았나요.네.
전래동화 빼고는 10살 때 만화 를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 읽은 게 처음이었어요. 그렇게 만화책만 읽다가, ‘아, 나쁜 애다’(웃음),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읽은 소설이 였어요. 제 인생의 책이죠. 그때부터 책 읽는 게 참 재미있더라고요.
- 다음으로는.그 옆에 꽂혀 있던 책이 라고 판타지 소설, 그다음으로 읽은 게 무협지 이고(모두 웃음), 그다음에 인데 역시 무협지, 그다음부터는 너무 많이 읽어서 책 제목을 다 기억 못해요.
-모두 장르소설만 읽었네. 부모님은 책을 안 사주셨나요.저희 가족이 책을 안 읽어요. (웃음) 도서관은 멀고 대여점은 가까워서요. 10대 때 제일 큰 고민이 버스비와 책 대여비. (웃음) 돈이 많이 나가니까요. 제 입장에서는 집안 사정 뻔히 아는데 버스비 나가는 것도 되게 스트레스 받았어요. 승차권을 잃어버리면 울었어요. (웃음) 책은 많이 빌리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게 가장 고민이었던 것 같아요.
-소설의 구조나 작법도 따로 공부한 적 없고요.네.
-문체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작가는 없었나요.혼자 계속 쓰다보니 특별히 그런 게 없어요. 게다가 문체는 흉내 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글을 쓸 때 최종본의 4~5배 정도를 썼다가 계속 조금씩 버리고 다듬어요. 그러다보면 종종 새벽이 되죠. (웃음)
-언제부터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고등학교 1학년 때 2차 팬픽이라는 패러디물을 쓴 게 처음이었어요. 제가 봐도 어색한 글이었는데 그냥 재미로 쓴 거죠. 20편 조금 넘기고 완결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는 거예요.
“인터넷 검색이 제 스승이죠” -그런데도 꾸준히 썼나요.그다음에도 몇 편씩 썼는데, 달리는 댓글은 다 이거였어요. “오타 좀 잡아주세요.” (웃음) 그런데 쓰면 쓸수록 처음보다 좀더 길게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상상했던 걸 변주하면서 쓰고 또 쓰고, 그 자체가 그냥 재미였죠. 대학생이 되고 나서 1차 창작이라는 것을 써보기 시작했어요.
-힘들지 않았나요.인터넷 소설은 댓글로 바로 반응이 보이니까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힘든 줄도 몰랐어요. 때로는 악플도 받고요. (웃음)
-악플 받았을 때의 느낌은 어땠나요.제가 잘못한 점이 있는지, 고칠 점이 있는지 일단 골똘히 생각해요. 받아들일 점은 즉각 받아들여서 고치고요. 아니면 그냥 넘어가요. 묻어두지는 않아요.
-정 작가의 스승은 익명의 독자들이네요.그렇죠. 독자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주는데요, 물론 그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점, 배울 점이 많아요. 그분들에게서 배웠기 때문에 지금 제 글이 있지 않나 싶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취향에 맞추나요.맞추기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엔 이유가 있어요. 예를 들어 독자들은 실제 주인공에 동화된 느낌으로 소설을 읽잖아요. 어린 시절부터 밟아가서 이렇게 성장했다는 걸 먼저 보이면 그게 훨씬 공감하기 쉽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성장 스토리가 나오고, 그다음에 러브 스토리로 넘어가는 거죠. 그 공식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글 쓸 때 공부를 엄청 많이 해요. 자료 조사 말고도 전자책 산업이라든가, 독자들의 취향, 출판사, 유통사, 시사 같은 걸 다 알아보고, 취합해서 미리 그림을 짜본 다음 그에 맞춰서 글을 써요. 어떻게 보면 계산된 거죠.
-무엇을 통해서 조사해요.인터넷 검색이 제 스승이죠. 거의 모든 자료를요.
“장르문학이라해도 소설 본질 안 달라져”디지털 외에 장르소설도 정 작가를 키운 자양분이네요. 장르소설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장르문학은 B급이고 즉각 소비하는 문학이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솔직히 장르문학이다 아니다를 구분지어본 적이 없어요. 제가 쓴 소설이나 읽었던 것들이 다 장르소설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어요. 일단 장르소설이라는 틀 안에 가둬놓는다고 해도 소설의 본질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아요. 그 안에 삶의 희로애락이 다 담기고, 독자들을 향한 메시지도 담기기 때문이에요.
-줄거리나 구성이 뻔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서는요반대로 생각해봐야 해요. 많이 나오는 이야기가 많이 원하는 거예요. 읽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 작품이 존재하는 거잖아요. 읽어주는 분들이 뭘 원하는지에 대한 반영도라고 저는 생각해요.
-작가로서 나이가 젊은 데서 오는 경험 부족은 어떻게 극복하나요.시간이 좀 나면 바깥에 나가보려 하고요. 역시 인터넷을 통해 전형적인 인물을 찾아봐요. 제가 얕기는 하지만 다양한 일을 많이 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화성휴게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정말 다양했어요. 설거지, 각종 음식 코너나 홀서빙도 했고요. 명절만 되면 독특한 아르바이트가 있어요. 여자 화장실 줄세우기. 정말 힘들어요. (웃음) 사람을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예전에 일본 어학연수를 가기 전에 돈을 벌려고 화장품 공장에 들어갔었어요. 그 안에서도 재미있는 일이 많더라고요.
-유로 콘텐츠로 성공했는데, 그쪽 전망은 어떻게 보고 있어요.우리가 인터넷 강국인데, 역설적으로 불법 복제가 성행했고 유료 콘텐츠에 대한 거부감이 컸죠. 예전에는 편당 100원이 아니라 50원도 굉장히 아까워했거든요. 유료화를 앞당긴 게 스마트폰인 것 같아요. 간편하게 결제할 수 있는 모바일 시장 덕분에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사실 저도 이번에 놀랐어요, 독자들이 그렇게 준비돼 있다는 사실에. 앞으로 더욱 확대되겠죠.
-인생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요. 너무 아쉬워서 인터넷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죠. 그래서 지금 3년짜리 적금을 들었어요. 다 모으면 캐나다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아는 작가 언니가 있는데 오면 관광은 공짜로 시켜준다고 해서요. (웃음)
독자와 호흡하며 성장한 작가의 미래작가가 되려면 원고지에 빼곡히 글을 써서 신춘문예에 응시하거나 선배의 추천을 받아 등단해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터넷 세계는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독자를 찾을 수 있게 했고, 이제 기꺼이 독자들이 돈을 지불하면서 자신들만의 작가를 키워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정 작가와 대화하다보니 일본 만화 이 떠올랐습니다. 은 연애에 숙맥인 한 남성이 우연히 전차에서 만난 아가씨와 성공적인 연애를 하도록 인터넷으로 연결된 익명의 네티즌들이 돕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연주 작가의 이야기에는 디지털 세계가 주는 꿈과 격려, 주인공의 성실함이 가져다준 행운이 함께하는 것 같은, 마치 만화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보물을 찾으러 간 어린 소녀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중 선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성장하고, 두 손 가득 선물을 받아오는 그런 기분이죠. 광대한 네트워크의 세계, 디지털로 연결된 그물망 속에서 익명의 독자들과 호흡하며 성장해온 작가의 미래가 앞으로 더 기대됩니다. 그게 우리의 미래이기도 할 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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