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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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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저렴한 위기관리

등록 2013-11-08 15:15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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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시행착오 뒤 인터넷 맛집 정보를 믿지 않게 된 내가 식당을 고르는 촉은 간판에 쓰인 이름이다. 그런데 ‘엄마손 식당’ ‘시골밥상’처럼 그럴듯한 이름에 끌려 들어간 식당에서도 간혹 낭패를 보곤 한다. 법률도 간판에 내건 이름과 속이 달라 ‘어이상실’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은데, 기초생활을 보장할 수 없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대표적인 경우다.

자기 이름을 배반한 ‘학교밖 청소년 지원법’

자기 이름을 배반한 또 하나의 법률이 국회 통과를 앞두고 있다. 김희정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여성가족부가 실제 주인공인 ‘학교밖 학업중단 청소년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그것이다. 학교 밖에서도 다양한 배움을 이어나가는 청소년들을 싸잡아 ‘학업중단자’라고 부르는 오만함은 일단 접어두자. “우릴 몽땅 보호관찰 대상으로 삼겠다는 거야?” 자퇴 뒤 요리사 과정을 준비하고 있는 한 청소년의 말마따나 이 법안은 학교 밖 청소년에 대한 ‘치안관리법’이나 다름없다. 기존 청소년복지지원법의 몇몇 조항을 옮겨 담아 윤색했지만, 법안의 핵심은 학교생활기록부에 담긴 정보를 몽땅 넘겨받은 정보 시스템 구축에 있다. 당사자의 동의 절차도, 어디까지 활용했다 언제 폐기하겠다는 약속도 생략한 채.

국가는 왜 학교 밖 청소년의 개인정보를 탐낼까. 해답은 법안의 발의 배경에 이미 적시돼 있다. “학업 중단으로 인해 비행에 가담하거나 노동시장에서 취약계층으로 전락하여 사회가 부담해야 할 사회·경제적 손실이 수십조에 이른다.” 국가가 학교 밖 청소년의 연락처와 주소, 출결, 행동특성 등의 정보를 탐내는 건 우범청소년 관리와 범죄수사에 활용하려는 목적에서다.

학교 밖 청소년은 그 존재 자체로 교육의 실패를 증거하고 체제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법안이 염려하는 것은 청소년이 놓인 삶의 위기가 아니라 국가가 놓인 위기다. 기존 시스템 안으로 청소년을 다시 밀어넣는 것이 가장 저렴한 위기관리 방식이다. 학교 밖 청소년의 단 10%만 학업 복귀를 원한다는 연구 결과도, 졸업장이 더 이상 미래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는 경제 현실도 이들 눈엔 보이지 않는다.

학교를 나올 때도 외로웠고 학교 밖에서도 황량한 현재와 불안한 미래를 홀로 감당해야 하는 28만여 청소년에 대한 지원체계 구축은 물론 절실하다. 가출 뒤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험담과 냉대에 시달리다 학교를 그만둔 미연이(가명)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상처를 헤아리고 기다려줄 학교, 그리고 자립을 준비할 동안 버틸 수 있는 괜찮은 일자리였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살며 일주일 내내 학업과 배달 알바를 병행해야 하는 정우(가명)는 시급 인상과 힘겹고 지겨운 알바를 잠시 쉴 만큼의 생활비 지원이 절실했다. 학교가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배우러 나온 수현이(가명)는 원하는 곳에서 다양한 세상과의 만남을 이어줄 학습 지원을 꿈꿨다.

차라리 ‘사육법’ ‘치안관리법’이라 하라

이들의 육성에 조금만 귀기울여도 삶을 보듬는 실질적 지원망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정보망임을 알 수 있다. 노려보거나 함부로 걱정하는 대신 자기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고 필요한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부르지 않아도 청소년들은 몰려들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법안 어디에도 생활과 학습의 자립을 확대 지원할 근거나 학교 밖 청소년에게 각자의 사정과 배움에 대한 기대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요청할 권리를 부여하는 조항은 없다. 청소년이 학교를 떠난 이유, 학교와 사회가 그들을 저버린 이유에는 눈과 귀를 틀어막은 지원법, 자유를 빼앗는 지원법이라면 그 간판을 ‘사육법’ ‘치안관리법’으로 바꿔 다는 염치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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