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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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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지옥, 재미없는 천국?

등록 2013-08-10 11:52 수정 2020-05-03 04:27

얼마 전 북유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복지 천국’ 북유럽의 네 나라는 행복지수에 서도 1∼4위를 차지하곤 한다. 해박한 지식 으로 방문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노 르웨이의 현지 가이드는 “노르웨이는 재미없 는 천국,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는 명쾌 한 표현으로 두 나라를 비교했다. 실제 북유 럽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이 구동성으로 삶이 참 밋밋하고 지루하다는 이야기를 토해내곤 했다. 내가 사는 나라가 아무튼 재미있고 역동적인 곳이라니 그 래도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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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내믹 코리아, 정말 즐거운가?

실제 북유럽 도시들에서 한국 같은 활력과 역동성을 발견하기 란 힘들다. 관광지구 일부를 제 외하면 퇴근 이후 거리는 참 한 적하다. 다들 가족·이웃공동체 와 ‘저녁이 있는 삶’을 살기 때문 이다. 정치도 지루하고 재미가 없 다. 정권이 교체돼도 큰 변화는 없다. 스웨덴은 사민당에서 보 수 정권으로 바뀌었지만 복지제 도의 큰 틀은 유지되고 있다. 한 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다. 지난 선거에서 보수의 선거 전략은 ‘노동노선’, 즉 노동시장 에서 배제된 노동을 끌어안는 것이었다. 좌 우 노선 간 차이를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나의 제도는 오랫동안 논쟁과 타협을 거 쳐 도입됐으니, 기원이 누구든 인정하고 수 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 제도 변화 또 한 오랜 시일에 걸쳐 이뤄지기 때문에 한국처 럼 피부에 와닿는 변화를 느끼기 어렵다. 국 민이 정치로 인해 스트레스 받는 일은 별로 없지만 정작 화끈한 ‘재 미’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이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한국처럼 시끌벅적한 ‘불금’(불타 는 금요일)이나 죽자고 마시는 회 식 대신, 넉넉히 허락된 시간 속 에서 가족·이웃과 함께 파티를 열고, 공동체를 일군다. 여름이 면 4주 이상 캠핑카를 타고 휴가 를 떠나는데, 휴가가 몹시 길다보 니 다양한 스포츠도 즐기고 휴식 도 취하고 책도 읽는다. 물론 장 기간의 해외여행을 하기도 한다. 청소년들은 입시나 사교육을 모 른다. 학교에서는 예비노동자로 서 노사협상을 배우고, 고등학생 때쯤부터는 상당수가 정당에 참 여하면서 정치를 직접 배운다. 이 런 삶이 그렇게도 재미없어 보이 는가?

물론 한국 사회는 정말 ‘다이 내믹’하다. 보름만 한국을 떠나보면 실감하 게 된다. 도무지 뉴스를 따라잡기 어렵다. 당 장 이번 여름만 하더라도 한 달 사이에 국가 정보원, 북방한계선(NLL), ‘사초(史草) 게이 트’ 등으로 정국이 매일 급변하고 있지 않은 가. 정말 재미가 넘쳐난다! 세계에서 가장 열 심히 일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던 직장인들은 하루아침에 잉여인력이 되어 구조조정된다. 퇴직금을 받아 자영업을 시작했더니 대형마 트가 생겨서 망하고, 안전빵으로 프랜차이 즈를 차렸더니 본사 송금에, 리모델링에 본 전마저 날린다. 아름다운 자연하천은 몇 년 사이에 대운하를 위한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가 정말 재미있는 건가?

차라리 지루한 정치를 보고 싶다

그동안 ‘재미’라는 프레임으로 표현된 한 국 정치 역동성의 실체는 과도한 열정 표출 과 높은 갈등 수준, 예측 불가능성과 다름없 다. 이 한국 사회의 다이내믹함의 실체는 경 쟁적인 속도전 속에 환경과 인간이 함께 탈 진하는 것이다. 재미라는 말 이면에는 이같 은 불편한 현실을 은폐하려는, 아니 재미라 는 프레임을 동원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을 견뎌보려는 무의식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 다. 물론 소수의 승자에게 이는 재미있는 희 극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수의 약자에게 는 피눈물 나는 지옥이다. 이 지루한 장마에 나는 재미없는, 지루한 사회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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