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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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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동네 어학원

등록 2013-07-24 13:52 수정 2020-05-03 04:27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방방송에서 추락한 아시아나 여행기 조종사들의 이름을 갖고 친 장난이 문제가 됐다. 전혀 그래 보이지는 않더라만, 만에 하나 이게 농담이었다 해도 이름, 그것도 이름의 발음을 소재로 한 농담이야말로 농담 피라미드의 최하단에 위치한 아메바짚신벌레미토콘트리아스러운 농담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 방송사의 사회적 정신연령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font size="3">섬팀왕, 위투로가 한국 사람?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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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농담의 저질적 본령을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얘네들이 한국인들의 이름이랍시며 내놓은 작명법이다. 섬팅왕, 위투로, 호리뻑, 뱅딩오. 이건 분명 한국이 아닌 동남아 나라 어딘가를 연상시키는 작풍이다. 여기에서 도출되는 잠정 결론은 무엇인가? 미국인들 대부분은 한국·중국·타이·베트남·라오스 등등 사이의 발음 차이 같은 거 전혀 모른다. 하긴, 알 게 뭐겠는가? ‘동양인들은 전부 똑같이 생겼어’라는 미국 B급 영화 제목이 함유한 미국인들의 지배적 정서는 얼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각종 광고나 TV 및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누가누가 영어 발음 미국식으로 잘하나 경연대회가 한창인 듯하다. 특히 한국인의 고질적 취약점으로 알려진 아르(r) 발음과 엘(l) 발음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는 작금의 ‘지뉴인 어메리칸 스따얼 프로나운시에이션’의 추세로 보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영어 발음으로 인해 거의 입국 즉시 검찰 고발감이라 사료되는 가운데, 쇼트닝유 두 드럼 음용 후 린시드유로 입가심한 듯한 이런 발음의 여파는 심지어 바른말 고운말 보급에 여념 없는 한 국영 음악 전문 FM 라디오 전파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니, 필자는 간만에 틀어본 이 채널에서 5초도 지나지 않아 튀어나온 “…그런데 팔츄귀즈는 스패니쉬와 프렌취의 하이버리드라는 퓌얼이 있어서…” 운운의 멘트에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급상승을 감지하며 라디오 전원 버튼을 눌러야 했으니, 아아, 촌스럽기 한량없어라, 이 내로우한 롸컬 스피리엇은.

이러한 작금의 추세를 보고 있노라니 예전 인도에서 겪었던 영어 ‘발음’ 장벽이 생각났다. 간헐적으로 식별되는 몇몇 단어로 미루어볼 때 영어라는 건 분명히 알겠으나, 아무리 들어도 이건 영어를 사칭한 인도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여행을 계속하다보니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도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는 걸 알았다. 그들 역시 마더르(mother)·파더르(father)·아더르와이즈(otherwise) 등 날아다니는 r 발음과 강력한 힌두어 억양으로 점철된 인도 영어에 적응하는 데 제법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고 했다. 심지어 한 캐나다인 여행자는 이렇게 푸념하기까지 했다. “캐나다로 돌아가면 인도 출신 애들하고 좀 친하게 지내야겠어.”

<font size="3">인도 유학생들과 친해지려는 학생들</font>

놀라운 건 이런 생각을 한 게 이 캐나다 친구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여행 뒤 만난 한 공대 교수로부터 들은 얘기에 따르면, 그가 미국 유학을 하던 당시 꽤 많은 미국인 학생들이 인도에서 유학 온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노력하더라는 것이다. 왜인가. 그 이유는 그 학교(흔히 세 글자 이니셜로 알려진 상당히 유명한 공대)에 수학 강국인 인도 출신 교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미국 학생들이 그 교수들의 강의를 좀더 잘 알아듣기 위해서는 인도식 영어 발음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란다.

필자는 인도 교수들의 그러한 천인공노할 발음에 문제제기를 하는 미국인 학생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그는 가벼운 탄식 섞인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동네 어학원이 아니니까.” 동네 어학원. 이 단어 종종 생각나는 요즘이다.

한동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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