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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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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고아 라스무스처럼

등록 2013-05-24 16:47 수정 2020-05-03 04:27

어릴 때 책 말고는 친구가 없었다. 부잣집 막내딸도 아니고 궁둥이 움직일 틈도 없는 단칸방에 살면서 엄마는 대문 밖을 나서면 나쁜 사람이 잡아간다고 사남매를 늘 집 안이나 대문 앞에서만 놀게 했다. 만화방이나 오락실은커녕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일도 거의 없었다. 친구를 불러들여 놀 수 있는 집도 아니고 기꺼이 놀러오겠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없었다. 이래저래 책은 내 친구, 아니 책만 내 친구였다. 그 시절 초등학생이 있는 집이면 필수품처럼 가지고 있던 빨간 양장표지의 동화책 50권 전집을 표지가 닳도록 읽었다. 나는 방랑고아 라스무스처럼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이야기보다, 소공녀처럼 제자리에서 착하고 열심히 살기만 하면 부잣집 아빠가 언젠가 데려가는 유의 이야기가 좋았다. 좋은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동화를 넘어 내 삶의 예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에서 깨친 리얼리즘

그런 내게 이주홍 선생의 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5학년 때엔가 그 책을 처음 읽었는데, 너는 다리 밑에서 떡 파는 할머니 아이라는 놀림을 받던 주인공에게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진짜로 주인공의 엄마라며 나타나는 이야기였다. 현실을 부정하던 주인공은 어느 순간 그 할머니를 진짜 자기 엄마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주워온 아이’라는 흔한 놀림을 아주 기쁘게 들었다. 심지어 그 놀림이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젠가 나를 데리러 올 진짜 부모는 지긋지긋한 가난 대신 내게 넓은 집과 예쁜 옷을 주는 부모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고 그런 부모가 찾아오면 키워준 부모와는 슬프지만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한다는 가증스러운 계획도 조금은 세우고 있었다.

그런 내게 그 책은 현실은 때로 더 잔혹할 수도 있다는 것, 내 바람과 정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 삶이라는 것, 그 삶을 끝끝내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속의 인자한 부자 아빠 대신 속의 괴팍한 할머니가 내 부모라고 나타난다면 나는 과연 작정한 대로 키워준 부모와 이별할 수 있을까.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몰랐지만 는 내게 리얼리즘을 가르쳐준 최초의 책이었다. 그때의 의문은 지금도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다. 못나고 더럽고 가난하고 지저분한 얼굴로 나타나는 인생의 수많은 진짜 엄마를 나는 어떤 방식으로 껴안아야 할까. 몇 번은 품었고, 몇 번은 모른 척 도망쳤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늙은 소공녀인가

시사 칼럼을 쓰면서 나는 를 처음 읽었을 때의 마음을 자주 떠올렸다. 사회에 대해 말하다보니 사회의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는데, 태어나 자란 환경이 그러한지 다리 밑 떡 파는 할머니 같은 삶만 계속 눈에 들어왔다. 그런 삶에 대해서만 자꾸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삶과 멀어지려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저 사람을 저렇게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저 사람이 내 엄마다, 정작 양심선언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스스로 살아내지 못하는 말처럼 공허한 말도 없는 듯하다. 나는 여전히 늙은 소공녀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말을 멈추고 삶 속으로 들어가 내 가난한 어미를 찾아보는 일이 어떨까 싶다. 스스로 양부모를 찾아나섰던 고아 라스무스처럼. 그런데 방랑고아 라스무스의 결말은 어떤 내용이었더라. 오랜만에 책도 좀 읽어야겠다. 짧은 글, 읽어주신 독자에게 감사드린다.

한지혜 소설가*한지혜씨가 이번 칼럼을 끝으로 ‘노 땡큐!’ 필진에서 떠나게 됐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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