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란 단어도, 어느새 한물간 게 아닌가 싶다. 애초부터 과대포장된 거품인 듯도 하다. TV 프로그램이나 CF는 물론이려니와 출판시장이나 각종 홍보물에서도 너나없이 흔하게 힐링이란 단어를 끌어다 붙이는 데 대한 괜한 반감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본디 사회·문화 트렌드의 ‘상품성’이란, 누구나 입에 올릴 때는 이미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타는 법이다. ‘착한’ ‘쿨한’ 따위의 수식어가 한때 인기를 끌다가 어느새 시들해진 것과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지난 20~30년 동안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이 결국 ‘거리’에서 ‘힐링’에 이르는 여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저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의미는 제각각일 테지만 말이다. 그 여정은 열정과 분노에서 치유와 위안에 이르는 과정일 수도, 외면에서 내면에 이르는 과정일 수도, 외침에서 울림에 이르는 과정일 수도, 혹은 집단에서 개인에 이르는 과정일 수도 있다. 더러 빠름에서 느림으로의 방향 전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게다. 그 기나긴 여정에서 위기와 불안, 충격과 상처라는 어두운 터널을 몇 차례 거쳐야 했음은 물론이다. 가까이는 지난해 말에 치른 대통령 선거 직후의 ‘멘붕’ 상황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2007년 이후 수년째 전세계를 휘감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도 꼽힐 만하다.
하나, 지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힐링 바람이 그 여정의 최종 종착지일까? 답은 분명 ‘아니다’라고 믿는다. 거칠게 말해, 힐링이란 치유나 위안, 곧 ‘상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건 마이너스(-)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플러스(+)로 나아가는 것일 테니. 단지 회복과 치유에 머무르지 않고, 말 그대로 ‘강장’하고 ‘보강’하고 ‘자양’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힐링이 지배하는 세상일지 모르나, 조만간 ‘힐링 이후’에 대한 대중적 허기가 들불처럼 번질 수도 있다. 힐링 이후에 자꾸 눈길이 가는 까닭은 힐링을 밀어낼 새로운 ‘히트상품’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미디어 역시 그 허기를 채워줄 답안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탓이다.
과연 힐링을 넘어 우리 사회를 강장하고 보강하고 자양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이쯤에서 힐링 이후의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성찰’이란 단어가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돈다. 스물일곱 살의 카를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해왔다. 중요한 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호기롭게 외친 바 있다. 그 유명한 에 담긴 11번째 테제이자, 사회철학사의 물줄기를 한순간에 바꿔놓은 문장이다. 굳이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산업화이건 민주화이건 언제나 ‘압축성장’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선 ‘해석’과 ‘변화’의 대립 구도의 방점이 늘상 변화 쪽에 찍혔던 걸 부인하기 힘들다. 으레 ‘행동’은 ‘사고’보다 한 수 더 높게 대접받아온 셈이다.
성찰의 첫 실마리는 아마 ‘해석’에서부터 풀리지 않을는지. ‘그간 우리는 무턱대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만 급급해왔다. 중요한 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해석해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