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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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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가 되어버린 중년 남자들

등록 2013-04-02 20:02 수정 2020-05-03 04:27

얼마 전 들은 유머 한 토막. 중년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첫째는 딸, 둘째는 돈, 셋째는 건강, 넷째는 친구다. 그럼 중년 남성은 어떨까? 첫째는 마누라, 둘째는 아내, 셋째는 와이프, 넷째는 집사람이라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여성은 남편에게서 독립해 인생 후반기를 근사하게 살고자 하지만, 남성은 정반대로 ‘아내 의존증’이 심해진다. 아내가 하루라도 집을 비우면 엉망이 된다. 그래서 “여보, 곰탕 끓여놨어요”라는 아내의 한마디는 중년 남성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든다. ‘곰탕’은 남편에게 아내의 부재와, 그 기간에 홀로 생존해야 함을 의미하는 기표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늙을수록 심화되는 ‘아내 의존증’

또한 나이가 들수록 엄마와 딸의 유대는 깊어지면서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된다. 이에 반해 아버지와 아들은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갖기 어렵다. 기껏해야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연민 정도일 것이다.

가까운 친구의 아버지가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친구의 상심이 컸다. 그런데 그 친구가 말하길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야.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여서.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아버지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막막했거든”. 우리 시대 아버지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대다수 자식들의 심경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우리의 아버지들은 경제적 생존이 지상 목표이고 가족 부양이 삶의 전부인 시대를 살아왔다. 그래서 타인을 배려하는 법도, 주위를 돌보는 법도 모른 채 그렇게 고독하게, 괴팍하게 나이 들어버렸다.

돌봄은 철저히 여성이자 엄마의 몫이었다. 남성은 경쟁사회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영혼을 위로받아야 하는, 돌봄의 ‘객체’였다. 그런데 자신의 경제적 역할이 수명을 다하자 남성은 오로지 도움만이 필요한 ‘잉여’로 전락해버렸다.

주변을 보면, 대체로 중년 여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더 독립적이고 활발하게 자기 생활을 유지해간다. 건강이면 건강, 친구면 친구 등 적극적으로 챙기고 관리한다. 그래서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여성의 회복 속도가 빠르다고들 한다. 중년 여성은 가족과 타인을 돌보는 데 ‘이골’이 났기 때문에 자신을 돌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직장 생활 외에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는 남성들이 은퇴 이후 새 일을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여성은 다르다. 고령화 등 사회적 변화는 더 많은 돌봄 노동을 요구하고 이와 관련된 일자리도 늘어나고 있다. 요양사, 아이 돌보미 등. 그래서 일정한 노동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경제활동도 가능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한국 남성의 평균 퇴직 연령은 53살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직장을 벗어난 삶을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 베이비부머 세대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의 말대로, 60대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경제적 부양을 대가로 아내에게 정신적·심리적 의존을 해왔기에 홀로서기가 불가능해졌다.

노년 연습은 ‘돌봄’의 실천부터

중년의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한다는 명목 아래 돌봄의 DNA를 상실했고, 자신을 돌보는 법도 잃어버렸다. 타인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돌볼 줄도 안다. 하지만 돌봄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나를 돌보는 법도 모른다. 그 결과 자립심, 자존감도 상실해간다.

경제적 부양을 핑계로 정서적 의존을 당연하게 여겨온 중년 남성들, 그래서 은퇴 뒤 정작 자유로운 시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린 그들! 이제라도 가족과 지역을 위해 돌봄을 조금씩 실천해보는 것은 어떨까? 더 외로워지지 않으려거든, ‘바보’가 되지 않으려거든 말이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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