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언어, 다른 시각’.
소소한 일상의 대화에서든, 전문적인 비판과 토론 과정에서든, 당신을 가장 들뜨게 만드는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주저 없이 이 두 가지를 맨 먼저 꼽는다. 이때야말로 잠자던 뇌세포가 빠르게 팽창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요즘엔 누구나 입이 닳도록 떠드는 소통이라는 행위의 생산성을 극대화해주는 비밀도 결국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같은 언어란, 말하자면, 일종의 프로토콜이다.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프로토콜을 맞추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빛과 같은 속도로 신호를 전송해버린다고 해도, 그 신호는 수신자의 품에 이르지 못한 채 우주 어딘가를 영원히 맴돌 뿐이다. 뉴스, 콘텐츠, 혹은 또 다른 그 무언가의 이름으로, 수많은 미디어가 쉴 새 없이 쏘아대는 신호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언어 못지않게 중요한 건 ‘다른 시각’이다. 요즘처럼 세상이 어지러운 때일수록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도덕’이다. 정치는 혼탁하고 경제는 고장났으며 문화와 윤리는 제 길을 잃었다는 탄식의 뒤편에선, 그 해법을 개인이나 집단의 이기심을 질타하고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인기를 얻곤 한다. 오랜 자본주의 역사에서 거듭 되풀이되는 흔한 레퍼토리다. 하지만 이같은 도덕론이야말로 사회나 조직에서 힘센 자가 그 반대편 사람들로부터의 비판이나 저항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고성능 방어막 구실을 하기도 한다. 시쳇말로, ‘좋은 놈’ 대 ‘나쁜 놈’이라는 프레임은 약한 자들이 불만과 비판을 토해내는 데는 쓸모 있을지 모르지만, 정작 기존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시스템 개혁’의 에너지를 되레 억누르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좋은 놈’과 ‘나쁜 놈’보다는 ‘이상한 놈’이 훨씬 많은 법이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댄 일방적 힐난보다 기존 프레임에서 벗어난 상상력과 정교한 분석이 한데 버무려진 비판이야말로 상대방에게 몇 배, 몇십 배 더 큰 위력을 안겨주는 건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선 무대가 단지 선악 구도만으로는 단칼에 가려내기 힘든 ‘이상한 놈’들의 세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주부터 편집장이란 이름의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1994년 이 창간된 이후 열한 번째 편집장입니다. 쟁쟁한 전임 편집장들과 선후배 동료 기자들이 땀 흘려 일궈온 성과에 기댈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제겐 커다란 위안입니다. 은 창간 이후 줄곧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진보적 매체 노릇을 자임해왔습니다. 이제 새로운 다짐을 해봅니다. ‘진보적 매체’라는 다섯 글자에 새겨진 자부심에 안주하지 않고, ‘진보하는’ 매체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겠습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란 옛말이 있지요. 선인들이 이 말 앞에 ‘사별삼일’(士別三日)이란 대구를 붙인 깊은 뜻을 헤아려봅니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953호도 창간 19돌 기념 특대호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19금’의 장벽은 넘어선 셈이네요. 돌아보면, 세상의 언어를 익히고 우리만의 시각을 가다듬는 긴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안’의 낯익은 금기와 성역마저 깨뜨리고 스무 살과 1000호를 향해 다시 뜀박질을 시작하는 에, 여러분도 기꺼이 ‘진보하는’ 독자로 화답해주시리라 기대하며 첫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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